춥다. 뼛속까지 시리다.
--- 본문 중에서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남의 자식을 떠맡아봤자 곤란할 뿐이다. 짐이 무겁다. 애당초 에쓰코는 경찰 기관지 제작에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이나 《R경인》의 편집을 맡으라고 한다면….
에쓰코는 이제 막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앞날은 알 수 없지만, 결혼하든 안 하든 일은 계속할 생각이었다. 육 년 전에 지방공무원 시험을 봤다. 단순히 불황 속에 높아진 공무원 인기에 편승한 건 아니었다. 몸이 약했던 아버지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네 자매 중 막내인 에쓰코를 단기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건 현청 근무 공무원의 탄탄한 복리후생 덕분이었다.
--- p.13
“그렇게 원하셨는데, 왜 형사가 되지 못하셨나요?”
“아휴, 당연히 못 되죠. 우리 남편, 경찰학교 성적이 꼴찌였거든요.”
“아….”
“알죠? 졸업 때 등수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요. 형사가 되려면 성적이 좋아야 하니까.”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래서 교도관으로 일하지만, 마음만큼은 형사니까 땅굴 형사라는 거예요.”
--- p.22
“하지만 남편분은 형사가 아니시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 남자 별건 체포됐었잖아요. 그래서 남편이 유치장에서 관리했었거든요.”
“어, 그러면 그때 무슨 단서라도 찾으셨나요?”
유키코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야마노이 자식, 날이 갈수록 이글거리더군.”
곤도의 말투를 흉내 낸 모양이었다. 유키코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저… 그게 무슨 뜻인가요?”
“글쎄요….”
금세 유키코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 p.25
백삼십, 백사십, 백오십… 속도계 바늘이 올라갔다. 웅웅거리는 엔진 소음. 바람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차체. 에쓰코는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곤도는 미동도 없이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순 살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액셀은 여전히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포르쉐는 멀어져갔다. 야마노이는 대체 몇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 걸까.
순식간에 현의 경계를 넘었다.
--- p.53
다다노의 뇌리에 예금통장 잔액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번 달과 다음 달은 어떻게든 버틴다고 해도 그 후를 생각하면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오려고 했다.
“아카즈카 씨.”
“응?”
“정말 부탁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바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렸다.
--- p.73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내 손으로 죽였다.’
그 말이 진짜일까.
전쟁 중에?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필 작업을 위해 한창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적군을 총검으로 찔러 죽인 과거를 고백한 노인도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효도는 ‘삼십 년가량 전’이라고 했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다. 즉 평화로운 일본에서 일어난 ‘보통의 살인’이라는 소리였다.
--- p.93
순간 사고가 멈췄다.
다치하라는 눈을 거듭 깜박거렸다.
익숙한 본부 빌딩 사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화면이 새까맸다. 거기에 빨간색으로 글이 적혀 있었다. 가로쓰기로 네 줄. 딱 봐도 영어는 아니었다.
프랑스언가…?
잘못 접속한 모양이다. 다치하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화면 상단의 주소를 확인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주소는 틀림없었다. 페이지 새로고침 버튼을 클릭했다. 그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 p.177
“다치하라, 내 말 듣고 있어? 이 건이 일반에 알려지면 당신 실직이야!”
실직.
그 구체적인 한 단어가 다치하라의 심장을 꿰뚫었다. 시야가 맥없이 일그러졌다. 아버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술내 나는 입김을 내뿜고, 고함치고, 때리고, 걷어차고, 아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뒤지는, 아귀처럼 비열한 모습.
없는 것을 빼앗으려 했던 아버지.
있는 것을 빼앗으려 하는 범인.
둘 다 증오스러웠다.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급여. 방 세 개짜리 관사. 적성에 맞는 일, 기대 이상의 계급.
이제 와서 손에서 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매스컴에 들킬 일은 없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 p.197~198
안도감이 샘솟았다. 선거 보도 실수에 비하면 무명 카메라맨의 한 건 따위 대수롭지 않은 실수다. 누군가 항의한다고 해도 이 소란에 싹 지워져서, 결과적으로 책망받는 일 없이 해결될지도 몰랐다.
아니….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국장을 비롯한 수많은 직원이 살기등등해 있는 상황에서 실수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다카나시의 실수가 더 크게 소문나고, 만회하기 힘든 상황에 몰리게 될 수도 있었다.
--- p.250
다카나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오전에 형사 두 명이 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관할 경찰서로 임의 동행을 요구받아, 온종일 조사를 받았다. 스가이의 집 거실 탁자 위에 다카나시의 명함이 있었다. 일의 경위를 숨김없이 털어놨지만 형사는 아직 더 들을 게 남았다는 얼굴이었다.
오후 여덟 시가 넘어서야 조사에서 풀려났다. 관할서 청사 뒤쪽에 경찰 담당에서 잔뼈가 룩은 구보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내가 용의자래?”
--- p.267
성격의 껍질을 깨부수는 극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춘기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쪽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현청에 들어오고부터였다. 강한 개성이 반드시 환영받지만은 않는, ‘모시는’ 일이 지극히 당연한 세계에 몸 두어보니, 오랜 세월 품고 있었던 콤플렉스가 엷어졌다. 아니, 소심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은 오히려 현청에서 일하는 구라우치의 무기가 되었다.
--- p.292~293
사 년 전의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서과장이 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구라우치를 비판한 투서를 그만 어르신이 본 것이었다. 현이 후원한 현민 볼링대회에 참가한 시민이 보낸 투서였다.
〈지사 대리로 온 비서과장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고, 붙임성도 없어서 불쾌했습니다.〉
첫 지사 대리 업무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는 게 진상이었지만, 어르신은 격노했다. “절대 잊지 마라. 대리일 때의 너는 곧 나다.” 구라우치는 아침 검토 때 그 투서를 본 기억이 없었다. 아직 비서과장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못 보고 넘겼던 거라고 생각했다.
---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