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저는 어린 친구들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제 기억에서 아련한, '청춘'이란 이름의 시절을 사는 친구들. 이다인과 차상헌이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원고를 써서 넘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았었습니다. 매일매일, 혹은 한 달 단위로 마감을 치르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 건강을 많이 잃었습니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쉬는 동안, 우연히 책방에서 낯선 장르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국내 로맨스 소설'이란 장르더군요.
뭐랄까… 겨우내 메말라 있던 땅에 촉촉이 봄비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한동안 문자와는 멀리 떨어져 지내겠다던 결심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몸이 좀 낫고 난 뒤 저는 어느새 {사랑스런 별장지기}란 작은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무엇인가를 쓰면서 '즐겁다'고 느꼈습니다.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애초에 의붓남매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설정도 이미 진부한 코드이고, 구성이나 스토리 역시 그리 독창적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목 또한 {사랑스런 별장지기}. 너무나 전형적이지요.
처음 로망띠끄에 연재를 시작했을 때 '제목이 촌스러워서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고 하신 독자님들이 꽤 계셨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어요. 다분히 일부러 그렇게 붙인 제목이었고, 작품의 정서도 비슷하게 풀어나갔습니다. 그냥, 그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서툰 첫사랑. 두근거리는 첫 느낌. 20대 초반 그 대책 없고 눈부신 순수함을, 기억의 창고를 뒤져 꺼내오고 싶었습니다.
상헌이의 집안 환경이나 조연으로 등장했던 유진이의 에피소드 등은, 아마도 처음부터 다시 쓴다면 그렇게 설정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로맨스 소설'이란 타이틀을 생각하다보니 무의식중에 관습적으로 배치한 주제넘은 안전장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출간이 결정되어 수정에 들어가면서, 이 부분을 포함한 전체 얼개를 다시 짜는 게 좋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겨울 처음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갔을 때의 즐겁고 행복했던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다인이와 상헌이의 이야기가 또다시 '마감을 앞둔 글쓰기'로 다가온다면, 참 서글플 것 같았거든요.
덕분에 여전히 모자란 부분이 많은 작품으로 선보이게 되어 송구합니다만, 제겐 너무 사랑스러웠던 젊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 모습 그대로 여러분께 안겨드리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산다는 게 상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산다는 게 감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연애 소설을 써볼까 해.'라고 말했을 때, '그거 멋진 생각이야!' 진심으로 동의하며 즐거워해준 제 오랜 동문 벗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습니다. 이진아, 손인호, 이건, 장석우, 백정승. 그 짠한 봄볕 같은 이름들께.
작품 연재할 곳을 찾다 우연히 알게 된 '로망띠끄'라는 사이트에 감사하는 마음, 로망띠끄 가족 여러분은 아마 다 모르실 겁니다. 인터넷상의 커뮤니케이션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던 제가 독자 여러분께 받았던 진심어린 격려와 애정에 감동하고, 낯설었던 닉네임들이 어느새 친숙해지며 그분들의 체취가 행간에서 묻어나오는 걸 느꼈던 경험. 메일함과 쪽지함에 차곡차곡 쌓이던 독자님들의 소중한 응원과 사랑의 사연들. 아, 오랫동안 못 잊을 것입니다.
작가들에겐 든든한 텃밭이 되어주고, 독자들에겐 큰 즐거움을 안겨주시는 로망띠끄 운영진 여러분께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때였음에도, 작품 하나만 보시고 시원시원하게 출간을 추진해주신 이경숙님. 작가는 수정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부분들을 노련하게 처리해준 매니저였을 뿐 아니라, 국내 로맨스 소설계 1호라 불릴 만한 전문 리뷰어로서, 작품이 살아날 수 있도록 살펴봐 주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스런 별장지기}를 애정을 가지고 모니터 해주셨던 유성희님 외 로망띠끄 엔젤 여러분, 작가 최수선님과 더불어 많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이 작은 이야기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서울 남산 케이블카 안에서 상헌이 다인에게 말했던 장면입니다.
'그때 여름 새벽에… 다친 손목은 아프고 머리는 복잡하고, 모든 게 귀찮았는데… 경찰서 서류에 사인하면서 네 이름을 봤어. 그냥, 네 이름을 보니 기분이 풀어졌어.'
저는 그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사랑을 믿습니다.
서른여섯 해 삶 동안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았던, 늘 주변을 끌어안고 살아왔던 남편 김도민 씨. 수식도 핑계도 은유도 없이, 주어진 삶을 정면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가를 묵묵히 실천하는 생활로 보여주며 한지붕 아래 나를 거두어준 사람…. 당신이 포맷해준 이 환경이 아니었으면 저 많은 가족들 안에서 혹은, 가족의 궤도 조금 밖에서라도, 내가 제대로 사람 구실 못했을 것임을 고백합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한때 소설가의 길을 걸으셨던 아버지. 참으로 터무니없이 모자란 작품이지만 맏딸이 쓴 이 작은 책으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기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을 쓰고 수정하는 동안, 성의를 다해 집안을 돌봐주셨던 양가의 두 분 어머니께도 큰 절 올립니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되어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은 순간일지라도 만나면 밤늦도록 메탈리카와 그들의 새 앨범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남동생, 언제든 전화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끄덕이며 들어주고 공원에 장고를 들고 나가 함께 우도 풍물을 칠 수 있는 여동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해놓은 일 가운데, 가장 경건하고도 가치 있었던 건 아들 동완이를 낳은 일이었습니다. 모자라고 부실한 엄마를 백퍼센트 완전하게, 거리낌 없이 사랑해주는 동완이에게 눈물 글썽해서 수없이 입 맞춥니다.
{사랑스런 별장지기}의 첫 시간적 배경이었던 푸르른 녹음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올여름에는 다시 한 번 속초에 가보고 싶습니다. 이 소품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과, 한 권의 책으로 엮어주신 현대문화센타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