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반미는 정서가 아니라 문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고 비난한 나라는 프랑스다. 이 과정에서 두 나라 사이에는 가시 돋친 설전까지 오갔다.
프랑스는 오늘날 반미 담론의 중심지이다. 지난 해 작고한 프랑스의 세계적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의 구심적 역할을 했고,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문제 전문 월간신문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전 세계적인 반미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왜 반미인가.
프랑스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자주노선을 견지해 온 것은 직접적으로는 드골주의의 유산이다. 하지만 그 사상 문화적 연원을 추적해 보면 프랑스 반미주의의 뿌리는 드골주의 이전에 이미 사회적 연대와 진보, 보편성을 추구해 온 프랑스적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앵글로색슨 국가의 일반적인 정서인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된 프랑스의 보편적인 인간 존중 이념이나 국가주의적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대조되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자유의 가치가 지나치게 비대하다 보니 연대의 가치가 들어설 틈이 좁아졌다. 이런 차이가 바로 미국의 보수성과 프랑스의 진보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반미는 단순한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문화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반미감정과 반미주의는 큰 차이가 있다. 문화로서의 반미주의는 미국이나 미국인을 체질적으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 패권주의적 폭력성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가치로서의 반미는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가치로 이해해야만 한다.
프랑스 정치의 다양성과 톨레랑스
2002년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을 두고 한국 언론은 '프랑스 대선 이변', '좌파 탈락', '극우파 선전' 등의 자극적인 제목을 뽑으면서 대서특필했지만 프랑스 대선에서 우리가 지켜봐야 했던 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는 프랑스 대선의 자유분방함이고, 두 번째는 프랑스 정치의 다양성이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는 그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색깔의 전시장이고 선전장이었다. 프랑스 대선 1차 선거에 나오지 않은 정치적 색깔은 지구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이다.
프랑스 공산당을 개량주의라고 비난하는 극좌성향의 트로츠키 정당 후보로부터 인종주의를 내세우는 극우파 후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인각색이고 천차만별인 후보가 16명이나 '난립'했다. 이번 대선에서 결선투표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극우 정치인 르펜은 공산당과는 천적 관계이다. 그래도 그는 프랑스 정치인인지라 특정 사상에 대한 반대나 비난은 해도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치인마저도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만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이 같은 언급은 프랑스식 톨레랑스가 단순히 이견이나 차이에 대한 의도적인 용인에서 끝나지 않고 이견과 차이의 존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의무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프랑스 정치는 해상도가 높은 컬러 TV다. 이에 비해 한국 정치는 흑백 TV이다. 그것도 비슷한 회색과 진회색 간에 색깔 시비를 벌이는 그런 수준이다.
프랑스 지식인의 앙가주망 전통
1851년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제국 건립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자 "헌법을 뒤엎고 시민의 의사를 짓밟는 정변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며 나폴레옹에 저항했던 대문호 빅토르 위고.
'나는 고발한다'는 그 유명한 공개서한(1898년)을 통해 보수적인 군부와 권력을 굴복시키고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게 한 에밀 졸라.
조국의 이익에 반해 알제리 독립전쟁을 지원하고, 강단이 아니라 주로 거리에서 민중들을 계몽하고 선도하며 철저히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
자신이 지식인이나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가장 혐오하며 거리에서건 파업현장에서건 민중운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습을 드러낸 세계적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사회 참여는 좌파 지식인이나 민중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지지만 앙가주망이 반드시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와 함께 진실 규명에 앞장섰던 사회학자 에밀 뒤르카임은 공화파 자유주의자였고, 드골 정권 하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유명한 앙드레 말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주저 없이 참전해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서 싸웠으며, 2차 대전 시기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전투적 지식인이다. 다른 나라의 지식인들에게 사회 참여가 '선택'이었다면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참여(앙가주망)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와 같은 프랑스적 지식인상은 연대와 관용에 바탕한 자유로운 지적 풍토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