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하고 대머리에 에너지 넘치고, 허세를 잘 부리고, 연기를 잘하고, 종종 떵떵거리곤 하는 흐루쇼프는 젊은 미국 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가난한 하층계급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성장 과정, 경력 행적, 정치적 이념에서도 케네디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젊은 케네디의 야망이 의지 강한 자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흐루쇼프의 야망은, 가족의 실패자로 여겨진 남편과 달리 아들의 성공을 보고 싶어 한 어머니의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케네디가 국가가 제공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면, 흐루쇼프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케네디가 사람을 다룬 경험이 2차대전 중 PT-109 순찰 어뢰고속정을 지휘한 것이 전부였다면, 흐루쇼프는 생애 대부분을 큰 프로젝트와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면서 보냈다. 케네디가 평생을 국제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준비했다면, 흐루쇼프는 60세가 넘어서야 고위급 외교에 처음으로 관여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도 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흐루쇼프 인생과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그보다 스물세 살 젊은 케네디는 바로 그해에 태어났다.
--- p.39
“만일 미국이 독일을 놓고 전쟁을 벌이겠다면 그렇게 하시죠. 아마 소련은 즉시 평화조약을 맺고 그에 따라 대처할 것입니다. […] 전쟁을 원하는 미치광이가 있다면 구속복을 입혀야죠.” 케네디는 깜짝 놀랐다. 지금 흐루쇼프는 대통령을 전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늦게 흐루쇼프와의 사담에서 베를린으로 화제를 다시 돌리려던 케네디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흐루쇼프는 강경했다. “무력에는 무력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케네디는 이 말로 대화를 마쳤다. “추운 겨울이 닥쳐올 것입니다.”
--- p.47~48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독일 주둔 미군 감독관이자 1948~49년 베를린 공수작전의 영웅인 클레이를 케네디는 자신의 자문관이자 서베를린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사절로 1961년 8월 서베를린으로 보냈다. 클레이는 그 목표를 달성했지만 10월 27일 모든 사람을 대단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날 그는 동베를린을 포함해 베를린 전체를 자유롭게 이동할 미국의 권리를, 2차대전 종결 직후 4개국 합의에 의해 보장된 대로 집행하기 위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간 국경의 체크포인트 찰리에 미군 탱크를 보냈다. 소련은 자국 탱크를 그 지점에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초저녁 즈음 2열의 탱크부대가 체크포인트 찰리 경계선 양쪽으로 100미터 미만의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했다.
탱크에는 포탄이 장전되어 있었고, 만일 상대가 포격하면 대응 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미군을 지휘하는 클레이 장군은 탱크를 이용하여 새로 건설된 베를린 장벽 일부를 부술 생각이었다. […] 10월 27일 오후 5시에 시작되었던 대치 상황은 10월 28일 오전 11시에 종결되었다. 현장의 명령은 가장 최고위층, 즉 백악관과 크렘린에서 내려왔다. 케네디도 흐루쇼프도 모두 대치 상황이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p.54
피그스만 침공으로 ‘죽을 고비의’ 경험을 한 피델 카스트로는 정권의 공식적 수사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상징적 축일로 채택한 국제노동자의 날인 5월 1일 아바나에서 행한 연설에서 카스트로는 자신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선언하고 법률가들에게 쿠바를 위한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그는 자신과 국가를 분단 세계에서 확고히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케네디가 사회주의를 싫어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제국주의를 싫어합니다!”라고 카스트로는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싫어합니다! 그가 자신들의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곳에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의 존재에 항의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제국주의-자본주의 정권의 존재에 항의할 권리를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 p.61~62
6월에 미국 공군은 15기의 주피터미사일을 터키에 배치했다. […] 주피터미사일이 2,4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고 모스크바에서 2,080킬로미터 떨어진 터키 이즈미르 주변에 배치된 것을 감안하면 미국은 모스크바를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 1962년부터 소련군은 3,700킬로미터 사정거리를 가진 R-14 또는 SS-5스키언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단거리, 중거리 미사일을 쿠바 해안에 배치함으로써 흐루쇼프는 미국의 목표물에 다다르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해결책처럼 보였다. […] 흐루쇼프는 그로미코의 의견을 물었다.
외무장관은 이 아이디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치국원이 되지 못해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우려를 표현하는 데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가져가는 것은 미국에 정치적 폭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그로미코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했다. […] “우리는 핵전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에 그로미코는 안도했다.
--- p.78~79
두어 해 전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는 미코얀은 이 작전이 비밀로 지켜질 수 없고 미사일이 일단 배치되면 미국의 탐지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는 흐루쇼프에게 1960년 현지에서 내 눈으로 본 것을 얘기했다. 미사일 발사장치를 은폐할 숲이 없고, 야자수만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라고 미코얀은 회고했다. […]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 단지 그것을 감내하고, 전 세계 앞에서 불명예를 감수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투자한 쿠바를 잃을 것인가요? 아니면 핵무기로 반격해서 전쟁을 발발시킬 건가요?” […] “당신 생각은 어떻소? 피델 카스트로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소? 그는 이에 동의할 것 같소?” 이제 외교관으로 변신하려는 KGB 장교는 자신의 모든 외교적 능력을 동원하여 대답했다.
그는 카스트로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모든 외국 기지에 반대하는 선봉에 서 있으며, 미국이 관타나모기지에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쿠바에 소련기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정책과 모순된다고 말했다. […] “당신 말대로 그들이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슨 놈의 혁명이란 말이오?”라고 말리놉스키는 소리쳤다. “나는 스페인에서 싸웠소. 그곳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받았단 말이오. […] 그렇다면 사회주의 쿠바는 받아들일 이유가 훨씬 많지!” […] 이념적 논쟁이 벌어지자 알렉세예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p.87~88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이라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긴박감을 드러내면서도 결의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지난주 일련의 공격용 미사일 기지가 그 감옥화된 섬나라에 준비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이 기지들의 목적은 다름 아닌, 서반구를 향한 핵공격 능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쿠바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은 “소련에 대한 전면적 보복”으로 대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보복 공격을 그 어느 때보다 우려하며 케네디는 봉쇄의 제한적 성격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한 것같이 생활필수품을 못 들어오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계속 건설하고 새 미사일과 핵탄두를 쿠바로 계속 수송하도록 허용한 그 오랜 망설임 끝에 케네디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선언을 크렘린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아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p.183
“우리가 공격하는 첫 번째 대상이 소련 잠수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존 케네디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나는 차라리 상선이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맥나마라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키몹스크호나 가가린호에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소련 잠수함들을 강제적으로 부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저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잠수함에 대한 공격을 늦추면, 대통령님, 극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케네디에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우리 함정을 쉽게 잃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포기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가 내각회의실에 설치된비밀 녹음테이프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사건의 방향을 처음에 주도했지만,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다”라고 로버트 케네디는 나중에 썼다. 숙고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대통령은 소련 선박들을 차단하는 것을 승인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의 형이 불안해하는 신호를 보았다. “그의 손이 얼굴로 올라가 입을 막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얼굴은 핼쑥하고 눈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마치 방 안에 다른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고,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닌 것만 같았다”라고 로버트는 회상했다.
--- p.216~217
소련 외무차관 바실리 쿠즈네초프는 몇 주 후 한 부하직원에게 은밀히 말했다. 미 전략공군사령부가 경계태세를 전쟁 직전 최고위 수준으로 상향했다는 정보를 받고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기겁해 까무러칠 정도였다”라고. […] 흐루쇼프는 볼샤코프를 통해 전달하려고 전날 작성해놨던 편지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미국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시설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흐루쇼프가 격앙된 감정을 폭발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측에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쏘면 그들도 쏠 것 같습니다”라고 흐루쇼프는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연하죠”라고 그는 선언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미국 측에 투사했다. […] 그러고서 그는 쿠바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이제 쿠바가 전 세계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만들었고, 체제끼리 서로 머리를 맞부딪치도록 만들었습니다”라면서 자신의 도박이 보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 p.228~229
위기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케네디는 자신의 참모보다 흐루쇼프에게 더 가까움을 느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거래를 제안했다. 문제는 케네디가 이것을 정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였다. 그는 엑스컴에서 유일하게 타협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나머지 모두가 반대했다. […]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변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원래 입장에서 후퇴함으로써 자신을 유약하게 보이게 만들 공개적 타협을 수용할 수 없었다. 나토 동맹국들에게 자신이, 오랜 세월 유럽이 더불어 살아온 소련의 핵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을 배신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했다.
--- p.254~255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잠시 동안, 명령이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츠코가 U-2기를 격추시킬지 말지 주저하는 동안 목표물은 레이다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명령은 효력을 유지했고 몇 분 후, U-2기가 쿠바 동쪽 끝에서 기수를 틀어 다시 아바나 방향으로 서진하고서 다시 레이다에 잡혔을 때 보론코프의 부하들은 준비가 되었다. […] “어떻게 할까요? 발사할까요?”
--- p.277
“갑자기 해군항공기가 적막을 깨뜨렸다”라고 슬로터는 잠수함이 부상하고 약 한 시간 반 뒤에 일어난 사건을 서술했다. “거대한 P2V넵튠 항공기가 상공을 선회했다. 항공기는 전자카메라 렌즈를 작동하기 위해 몇 개의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빵! 빵! 빵! 번쩍이는 불빛으로 눈이 부셨다.” 슬로터는 잠수함 함교의 장교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몇 분 뒤 다른 일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한” 잠수함 함장은 “선수의 어뢰관을 코니호에 조준”했다고 슬로터는 기록했다.
구축함 코니호로서는 공포의 순간이었으나 함장인 윌리엄 모건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코니호 함장은 나에게 P2V기의 공격적 행동을 사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라고 슬로터는 기억했다. 그는 조명등을 켜서 이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행히도 메시지는 짧은 것이었다. 슬로터는 자신이 작은 오해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을 예방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코니호와 잠수함을 둘러싸고 있는 미 해군 선단을 겨냥한 어뢰는 핵탄두를 장착한 상태였다.
--- p.292
이때가 워싱턴 시각으로 아침 9시였다. 일요일 아침이었고, 케네디는 대국민 연설을 할 계획이 없었다. 흐루쇼프와 동료들을 그토록 놀라게 하고, 케네디에게 보낼 편지를 재촉하게 만든 그 케네디의 연설은 계획된 적이 없었다. 소련 군사 스파이들은 10월 22일 자 케네디 연설의 재방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여러 번 발생한 것처럼 이것은 착각이었다. 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였다.
소련 측은 아마도 부족한 영어 지식으로 TV와 라디오에서 들은 것을 혼동했을 것이고 더욱이 미국 정치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었다. 설사 케네디가 일요일인 10월 29일 대국민 연설을 하려고 했다 해도, 자신과 국민들이 예배하러 교회로 향하는 아침 9시로 시간을 잡았을 리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인 소련의 정보원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중의 실수였지만, 다행스러운 실수였다. 지금은 전쟁만 피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방송을 타고 있었다.
--- p.321
미사일 기지 철수 뉴스는 소련 병사들 사이에 큰 혼란을 일으켰고,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가 갑자기 이것을 해체하고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아, 가뜩이나 저하된 사기가 더 악화되었다. “그럼 우리를 왜 쿠바에 보낸 거야? 왜 이런 장비를 여기에 가져왔다가 다시 가져가는 거야?”라고 메탈루르그 아노소프호를 타고 쿠바를 떠난 사병 스토야노프는 동료 병사들에게 물었다. […] 소련 장교들과 병사들은 쿠바인들에게 기대했던 감사 인사도 듣지 못하고 쿠바를 떠났다. “쿠바 철수 과정은 우리 병사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라고, 전술핵탄두를 다루는 집단의 지휘관 라파엘 자키로프는 말했다.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야간에 트럭에 장비가 실렸습니다. 쿠바 동지들의 작별 인사도 받지 못했죠. 소련 수송선은 다른 배가 없는 빈 부두에 대기했습니다. 모든 병사가 명예롭게, 이기심 없이 군사 임무를 수행하고 조국의 명령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떠난 겁니다.”
--- p.359
요구하고 위협한 것은 또다시 케네디였지, 흐루쇼프가 아니었다. 이전에는 의제와 사건 추이의 속도를 후퇴할 때조차 흐루쇼프가 주로 정했다면, 이제 주도권을 잡고 쇼를 펼치는 것은 케네디였다. 케네디와 참모들은 승자독식 무드에 사로잡혔고, 더 이상 흐루쇼프가 쿠바를 놓고 핵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새로운 양보를 요구했다. 10월 20일 케네디는 참모들에게 쿠바에 있는 소련 폭격기를 안고 살아야 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관용은 불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케네디로부터 점점 압력을 받고, 날이 갈수록 핵무기를 사용할 의지가 없어지는 가운데 흐루쇼프는, 한편으로 카스트로와 세계 혁명에 대한 자신의 당찬 꿈과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자국의 이익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 p.375
11월 19일 저녁이 되자 카스트로는 폭격기를 둘러싼 전투에서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미국과 타협을 해버린 것이다. 카스트로는 프로파간다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과 세계 언론은 쿠바가 핵전쟁을 막기 위한 두 강대국 사이의 합의에서 핵심 장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점점 더 우려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케네디의 대국민 연설이 임박했다고 미국 언론이 보도한 것이다. 카스트로는 케네디가 쿠바를 공격하고 모욕을 줄 것을 우려했다. “우리를 걸레처럼 만들어서” 쿠바인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이들이 지도자를 포기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 그는 미코얀에게 쿠바는 봉쇄를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봉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혁명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미코얀은 카스트로의 혁명적 수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카스트로가 얼마나 피로한지 알았기에 그의 말에서 판단 실수를 지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미코얀은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 p.379~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