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꾸랑은 꼴렝 드 쁠랑시가 탁월한 조언으로 제시해 준 전거문헌을 비롯하여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선비들, 그리고 그가 서론에서 밝힌 바대로 서울의 교구장인 뮈뗄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다만 모든 왕실도서관의 장서목록 중에 가장 훌륭한 <서고장서록>과 1908년에 와서야 간행된 <문헌비고>내의 예문고 등 2종의 중요서목은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꾸랑이 조정의 목록들을 번역하는데 만족했었다면 그의 작업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7C의 그의 한국인 선행자처럼 행하면서 그의 문헌조사의 결함들을 보강해 나갔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노상서점, 대본소, 사원의 서고, 개인소장처 등지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고 설명을 달고 목록카드를 모았으며 이 같은 연구는 유럽과 일본으로도 이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꾸랑은 19C 말 한국인 자신들을 위한 그들 국가의 기술(記述)문화와 구술(口述)전통을 제시한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은 당연히 한국어로 번역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솔직히 말해 그것이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놀랄 만한 일이다. 그것은 물론 엄청난 시도로, 완벽한 불어의 기량을 가진 가능성 있는 번역자로 하여금 서지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 두가지 능력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 전에 15C의 한국의 인쇄를 다룬 그의 논문으로 프랑스 전문가들 사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희재 교수에게서 이루어졌다.
--- 권두사 중에서
<한국서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꾸랑은 꼴렝 드 쁠랑시가 탁월한 조언으로 제시해 준 전거문헌을 비롯하여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선비들, 그리고 그가 서론에서 밝힌 바대로 서울의 교구장인 뮈뗄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다만 모든 왕실도서관의 장서목록 중에 가장 훌륭한 <서고장서록>과 1908년에 와서야 간행된 <문헌비고>내의 예문고 등 2종의 중요서목은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꾸랑이 조정의 목록들을 번역하는데 만족했었다면 그의 작업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7C의 그의 한국인 선행자처럼 행하면서 그의 문헌조사의 결함들을 보강해 나갔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노상서점, 대본소, 사원의 서고, 개인소장처 등지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고 설명을 달고 목록카드를 모았으며 이 같은 연구는 유럽과 일본으로도 이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꾸랑은 19C 말 한국인 자신들을 위한 그들 국가의 기술(記述)문화와 구술(口述)전통을 제시한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은 당연히 한국어로 번역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솔직히 말해 그것이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놀랄 만한 일이다. 그것은 물론 엄청난 시도로, 완벽한 불어의 기량을 가진 가능성 있는 번역자로 하여금 서지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 두가지 능력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 전에 15C의 한국의 인쇄를 다룬 그의 논문으로 프랑스 전문가들 사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희재 교수에게서 이루어졌다.
--- 권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