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사후 옛집이 곧장 묘우로 개조된 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남송(南宋) 소흥(紹興) 갑인(甲寅)년(4년, 1134년)에 출판된 『동가잡기(東家雜記)』로, “노애공(魯哀公) 17년에 옛집에 묘우를 세우고 묘우를 지키는 가호(家戶)를 100호(百戶)나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가잡기』는 공자의 17대손인 공전(孔傳)이 지은 책으로, 공자 집안의 첫 번째 지지(地誌)이다. 그 이후의 지지(地誌)들은 모두 그에 따라 공자문묘가 노애공 17년(B.C. 478)에 출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p.22
진(晉) 왕조는 궐리(闕里)의 공자문묘에 관심이 많았다. 태시(泰始) 3년(267)에는 노(魯)나라에 명하여 철마다 세 희생물을 갖추어 공자에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공자의 종손을 봉성정후(奉聖亭侯)로 봉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태녕(太寧) 3년(325)에는 조서(詔書)를 내려 봉성정후(奉聖亭侯) 공정(孔亭)에게 철마다 공자에게 제사할 수 있는 경비를 지급하였다. --- p.48
만주족 귀족은 공자 사상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명 만력(萬曆) 35년(1607)에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허투알라성[赫圖阿拉城, 현 요녕성(遼寧省) 신빈(新賓)]에 공자문묘를 세웠고, 입관(入關) 전 성경(盛京)에도 공자문묘를 세웠다. 숭덕(崇德) 원년(1636)에는 이곳에 관리를 보내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고, 숭덕 5년에는 봄·가을 두 차례(음력 5월·8월) 석전례(釋奠禮)를 올렸으며, 입관 후에는 ‘숭성학(崇聖學)’을 전국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 pp.188~189
민국 연간에 일어난 두 번째 파괴는 공자문묘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조하면서 일어났다.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고 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유학이 국가 지도 이념이 되는 역사는 막을 내렸다. 1912년 공포한 『대학령(大學令)』에서 경과(經科)를 폐지하고 유학경전을 다른 학과로 배속하였으며, 학교에서 “공자 존숭과 경전 학습”[尊孔讀經]을 금지하였다. 이로써 유가 경전이 전한(前漢) 이래로 학교의 주요 교과서로서 역할을 해왔던 2000여 년의 역사가 종결되었다. 원세개(袁世凱)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는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1913년 『통령존숭공성문(通令尊崇孔聖文)』을 발포하여 전국 곳곳에 ‘존공독경’을 회복하도록 명령하였고, 각급 학교마다 독경 과정을 개설하도록 결정했다. 1914년 9월에는 『제공령(祭孔令)』을 반포하여 공자 제사를 전면적으로 재실시하도록 명하였으며, 강유위(康有爲) 등 봉건시대 문인들은 원세개(袁世凱)의 지지하에 제멋대로 ‘존공숭유(尊孔崇儒)’를 주창했다. --- p.218
사천성 부순현학문묘(富順縣學文廟)는 최초 북송(北宋) 경력(慶曆) 4년(1044)에 지은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청 도광(道光) 16년(1836)에 세운 것들이다. 문묘에는 정문을 설치하지 않았고, 문묘 정면에는 ‘수인궁장(數?宮牆)’이라고 적힌 문병을, 문병 양 끝에는 각각 작은 문을 만들어 동쪽에는 ‘성역(聖域)’, 서쪽에는 ‘현관(賢關)’이라고 하였다. …(중략) … 이러한 형식은 비교적 독특한 형식이지만, 덕배천지와 도관고금 방은 문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물로 일반적으로 동서쪽 문묘 담에 만들어졌다. 방 북쪽의 동서 양쪽에는 극문(戟門) 옆의 두 곁채와 비슷한 명환사, 향현사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문묘의 부사건물에 속한다. --- p.306
선현 종사는 역사상 단 한 차례 폐지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명 가정 9년의 사전을 개정했던 때였다. 당시 신당(申黨)을 신정(申?)과 같은 급으로 생각하여 신당을 종사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또한 공백료(公伯寮), 진염(秦?), 안하(?何), 거원(?瑗), 임방(林放) 등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자의 제자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이들도 모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신당, 공백료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청 옹정 2년에 종사의 자격이 모두 회복되었다. --- p.462
통찬이 “예찬(?饌)”이라고 창하면 사찬관(司饌官)이 전 안의 공자의 신안(神案) 앞으로 가서 한 번 조아리고 일어서서 찬반(饌盤)을 높이 받들고 전으로 나간다. 4배, 12철의 진설생도 한 번 조아린 후 각 단의 찬반을 높이 들고 사찬관(司饌官)을 뒤따라 노대에서 중간 계단으로 내려간다. 다른 각 단의 진설생도 제단의 찬반을 높이 들고 사찬관(司饌官)을 뒤따라 침전에서 서액문(西掖門)으로 나가서 예소(?所)에 찬을 묻은 후에 배위로 돌아온다. 통찬이 “사신(辭神), 삼궤구고두(三?九叩頭)”라고 창하면 정헌관 이하 모두 3궤 9고두의 절을 하며 휘생은 휘를 내리고 악생은 음악을 멈춘다. --- p.513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 전국에는 각급 학교 문묘 1740개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문묘는 539개이며, 그중에서 1980년대 이후 수리와 복원을 거쳐, 현재 비교적 완전하게 복구된 것은 93개, 거의 완벽하게 복구된 것은 107개, 주요 건물들 모두를 복구한 것은 64개, 대성전(大成殿) 등 일부 건물만을 복구한 것은 275개이다. 1949년 이후 중국 광동성(廣東省) 삼수(三水)와 조양(潮陽),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분양(汾陽)에서 체계를 갖추어 공자문묘를 새로 지었고,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에서는 대성전 등 문묘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남녕(南寧)에서는 학교와 문묘를 중건했다. --- p.537
악록서원(岳麓書院)은 초기에 세워진 유명한 4대 서원 중 하나로, 북송 개보(開寶) 9년(976)에 처음으로 창립되었다. 담주태수(潭州太守) 주동(朱洞)이 5대(五代) 말 승려 지선(智璿)이 만든 서당을 토대로 “옛것을 바탕으로 확장하면서(因襲增拓)” 정식으로 서원을 창립했는데, “강당은 다섯 칸, 학사는 52칸이 있었다(講堂五間, 齋舍五十二間)”. 함평(咸平) 2년(999)에 태수(太守) 이윤칙(李允則)이 중수할 때 “선사, 10철의 소상을 만들고 72현인을 그렸다. 황제와 관리, 유학자들의 모습은 모두 옛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 p.6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