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는 계획을 짜지 않는다. 나도 딱히 계획을 분 단위로 짜지는 않지만 겉으로는 다 생각해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군다. 엄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이쁘다’라고 한다. 나는 ‘예쁘다’라고 한다. 엄마는 세세한 디테일은 금방 까먹는다. 나는 알베르게의 주인장이 할머니였는지 할아버지였는지, 우리에게 ‘올라’ 하고 인사했는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는지를 기억한다. 순례길을 걸으며 알게 된 우리의 모습이다.
---「프롤로그」중에서
2.
“다 하나씩 달라고 해, 올 원(All One)해!”
엄마가 속삭인 말을 그냥 웃어넘겼는데, 빵집 주인의 웃는 얼굴 앞에 서니 막상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그냥 엄마의 말대로 올 원! 을 외쳤다. 어리둥절한 빵집 주인 앞에서 빵 하나하나를 빠르게 가리키며 원원원원 했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민망해서 웃고 엄마도 빵 터졌다.
“오케이, 원, 원, 원…”
웃음 가득한 얼굴로 하나하나 빵을 담아주셨다. 점심거리 해결!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중에서
3.
내가 유럽에 온 이후 엄마의 번역기 역할, 지도 역할, 사전 역할, 구글 역할 등등을 다 해내고 있어서 ‘엄마 불신병’이 약간 도졌다. 엄마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이 낯선 곳에서? 외우는 것만이 살길이다! 엄마 귀가 닳도록 달달 읊었다.
어어, 말이 많아. 엄마만 믿어. 그렇게 엄마가 먼저 갔다.
---「수비리(Zubiri)」중에서
4.
“근데. 윤은 정말 영어를 잘하네요.”
“아, 정말요?”
“정말로! 어디서 배운 거예요?”
“저요? 전… 넷플릭스 미국드라마들을 많이 본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근데 다 범죄 장르여서 못된 말들만 많이 배웠어요. 영어로 욕할 줄 알아요.”
맞다. 나는 미국드라마를 정말 좋아한다. 마냥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자퇴한 이후 유일하게 꾸준히 한 일이 미국드라마를 본 거였다. 그래도 무념무상 열심히 죽어라 반복해 봤더니 영어가 일취월장했다. 영어에 흥미가 생겨 어쩌다 한번 해본 펜팔로 폴란드 사는 친구까지 생겼다. 유럽에 와서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엄마도 그런 나를 보며 조금 신기해했다. 나조차도 신기했다.
---「팜플로나(Pamplona)」중에서
5.
“걷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걷지는 마. 웃으면서 걷자.”
“걷기 싫어 죽겠는 거 맞거든!”
엄마의 말에 아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주저앉아버렸다. 엄마는 먼저 가고 나는 앉아서 시간을 좀 가졌다. 성질을 내고 나면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마음속에서 불편함이 확 올라왔다. 내가 틀린 상황이 아니라면 한바탕한 이후로도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 따지고 싶은 말이 계속 쌓이기 마련인데 이번은 확실히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엄마를 얼른 따라가서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고장 난 몸이 나를 잡았다. 가방을 일단 던져두고 어깨를 살살 돌려보다가 새천년 국민건강체조를 찾아 켰다.
---「로르까(Lorca)」중에서
6.
짐을 보내둔 마을 초입의 사립 알베르게로 가서 짐을 찾았다. 짐 보관료와 물값을 치르고 무거운 짐을 껴안고 뒤뚱뒤뚱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친절한 호스피탈레로가 우리를 맞아줬다.
“엄마랑 딸이라고요? 어쩌다가 까미노에 오게 됐어요?”
“우리는 우리한테 이 길을 다 걸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칼을 갈고 연습했던 문장이었다.
---「나바레떼(Navarette)」중에서
7.
엄마가 같이 사진을 찍자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치즈~ 하는데 할아버지가 엄마를 보며 뺨을 톡톡 두드리기까지 했다. 볼 키스를 해주라고? 이건 정말 아니지! 엄마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나는 이 상황이 정말 불쾌했다. 존의 문화권에서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볼 키스를 요구하는 남자를 기분 좋게 넘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 말고는 모두가 웃고 있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고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세상에 엄청나게 합리적이며 모든 것을 아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묻는 거다. 내가 기분이 나빠도 되는 상황이니?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중에서
8.
내 이름은 모두가 물었다. 내 나이도, 왜 길에 왔는지도 물었다. 엄마에게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묻지 않고도 ‘어머니’, 엄마’ 같은 호칭을 가져다가 불렀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이곳에 다시 혼자 와야 할 거라고. 나의 엄마로서가 아닌 개인 김항심으로 말이다. 엄마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사람이 아닌,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순례는 왜 하고 있는지 같은 질문이 당연한 개인으로서 말이다.
---「부르고스(Burgos)」중에서
9.
마음도 고쳐 달고 싶었다. 반으로 깨진 가리비에 부정적이었던 마음과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을 담아 십자가에 잘 매듭지어 달아두었다. 지금까지의 나를 담아두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걷자는 소원이었다. 예전에 사뒀던 새 가리비를 가방에 매달았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 달고 걸었다.
---「폰페라다(Ponferrada)」중에서
10.
그러나 순례길은 존재한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길 자체가 아니라 걷는 우리에게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누군가에게 나는 진정한 순례자가 아니겠지만 나는 나만의 순례를 마쳐가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 길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내가 이 길에서 얻었던 배움은 진실이다. 까미노는 오롯이 걷는 사람의 것. 길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고, 무언가를 배워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포르토마린(Portomarin)」중에서
11.
“이 까미노는 끝났지만 앞으로 당신 인생에 다른 까미노들이 있을 거예요. 이제 그 길들의 시작이니까. 새로운 길을 위해 부엔 까미노!”
표지석도 화살표도 없는 냉정한 여행지로 향한다. 본격적으로 시작할 가이드 노릇에 떨리기도 하고 내리자마자 길을 잃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이상한 자신감이 있다. 천하태평하게 오른 순례길도 이렇게 잘 마쳤으니까 여행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우리의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가면 맛있는 뼈해장국 한 그릇을 먹어야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중에서
12.
앓았던 몸살감기 이후의 기억에는 안양천이 있다. ‘걷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점, 돌아와서도 걸을 곳을 찾았다. 그렇게 서울이라는 타지에 뿌리를 내렸다. 2호선의 내선순환과 외선순환 열차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무작정 돌아다녔다.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하고, 글을 쓰고, ‘삶’다운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그 속에서 종종 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순례길에서의 기억을 꺼냈다. 그런 길을 걸었었고, 지금은 여기 있다고.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