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아이브스에 터전을 잡은 헵워스는 주변의 풍경을 열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여성 예술가가 드물던 시대에 그녀는 폭넓은 소재를 활용하고 재료의 질감과 네거티브 스페이스(형상의 뚫린 공간 혹은 형상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옮긴이)를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한편, 조각물과 주변 경관이 서로 소통하게 함으로써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헵워스의 조각은 대체로 추상적이지만 자연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내 조각은 전부 자연경관에서 나온 것”이라며, “갤러리에 들어앉은 조각품들에 신물이 난다…풍경과 나무, 공기, 구름으로 돌아갈 때 조각품은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주장했다.
--- p.32
달리는 어린 시절 카다케스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냈으며, 훗날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칭송했다. 수려한 해안과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펼쳐져 있고, 사방에 부겐빌레아 꽃이 만발하며, 흰 벽에 푸른 대문과 창문이 달린 산뜻한 집들이 사파이어 빛깔의 바다를 배경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이다. 20세기에 들어 카다케스는 문인과 화가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다. 달리는 물론이고 르네 마그리트, 앙리 마티스, 호안 미로, 마르셀 뒤샹, 루이스 부뉴엘, 파블로 피카소 등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카다케스와 인근 해안의 경관은 달리의 대표작인 ‘섹스 어필의 환영(1932)’과 ‘기억의 지속(1931)’ 등에 녹아 들어가 있다.
--- p.52
1900년 여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빈에서 지내는 건 너무 지겹고 끔찍해.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지고, 뜨겁고, 불쾌하거든.” 이 하소연이 통한 덕분에 그는 도시의 더위를 피해 처음으로 아터제 호수를 방문하게 되었다. 클림트는 그 후 15번의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며, 제발헨, 리츨베르크, 바이센바흐 등 작은 호숫가 마을에서 그가 평생 그린 50점의 풍경화 중 45점 이상을 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지낼 때면 절친인 에밀리 플뢰게의 가족과 어울렸다. 처음에는 바이센바흐에서 가까운 플뢰게 가족의 별장에서 지냈고, 나중에는 올레안더 별장을 거처로 삼았다.
에밀리의 언니 헬레네가 클림트의 남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한 사이였지만, 에른스트는 1892년에 2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클림트가 헬레네와 조카딸을 부양하게 되면서 에밀리와도 가까워졌지만,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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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던 중 탕헤르를 찾았다. 그는 이 대도시의 밝고 풍부한 빛, 선명한 색채, 다채로운 햇살과 독특하고 이국적인 건축물에 깊이 매료되었다. 페르시아 예술품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들라크루아의 북아프리카 그림에 찬사를 보냈으며 폴 고갱에게 색채에 관한 조언을 받았던 그는 탕헤르의 풍경에 크게 만족했고, 이 방문은 그의 작품과 화가 경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티스는 탕헤르의 빛이 ‘다정하’고 이 도시는 ‘화가의 낙원’이라면서, 풍부한 안료와 생동감 있는 붓놀림, 대조적인 패턴으로 이곳을 화폭에 담았다.
--- p.156
전체 46개의 판화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호쿠사이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해준 작품은 단연 ‘가나가와(神奈川)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세 척의 배를 집어삼킬 듯이 높이 솟아 있고, 바다 너머 아득한 곳에 후지산이 보인다. 안정적인 구도를 파괴하기 직전인 커다란 파도는 자못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파도 속에 이즈(伊豆)와 보소(房?) 반도에서 잡은 생선을 에도만까지 운반해오는 ‘오시오쿠리부네(급송 화물선)’ 세 척이 떠 있다. 각 배에서는 여덟 명의 사공들이 노를 붙들고 있고, 그 앞으로 승객 두 명이 앉아 있다. 배와 사람들의 모습이 거대한 파도와 대비되어 자연의 강력한 힘이 더욱 도드라진다.
--- p.164-168
아이티와 푸에르토리코 혼혈인 바스키아는 두 나라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라피티를 예술의 영역으로 들여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일찍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갖게 된 데는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특히 어머니는 어린 바스키아를 뉴욕 최고의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등)에 데리고 다니며, 6세 때부터 여러 미술관에 회원으로 등록시켜주었다.
비록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바스키아는 1970년대에 친구인 알 디아즈와 로어맨해튼 일대에 낙서를 하고 다니며 SAMOⓒ라는 태그를 남겼다. Same Old Shit(뻔한 짓거리)의 약자였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이들의 낙서에는 정치적인 시구절이나 랩 가사, 구호 등이 들어 있어서, 동시대 예술가 및 언론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담벼락이나 지하철에 그린 이들의 낙서는 곧 뉴욕이라는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 p.179-180
프리다 칼로(1907~1954)가 자란 일명 ‘파란 집(라 카사 아술La Casa Azul)’이 바로 이 코요아칸에 자리 잡고 있다. 1904년에 지어진 ‘파란 집’은 인근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중앙 뜰과 정원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거주 공간은 2층짜리 파란색 건물로, 침실과 작업실, 넓은 부엌과 식당을 갖추고 있다. 사방에 밝고 선명한 색상이 칠해져 있고, 현관 홀에는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다. 이곳은 프리다가 사망하고 4년이 지난 1958년에 미술관으로 개조되어, 현재까지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