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자가 의사를 찾아가서 살 날이 고작 몇 달 안 남았다는 말을 듣는다……. 카르멘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손으로 입을 막고 어깨를 마구 들썩이며 울기 시작한다. 뱃속이 조여든다. 나는 한 팔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준다. “한 방 맞은 것 같지요?” 의사가 우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한다. 우리는 대꾸하지 않는다.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앉아 있다. 카르멘은 울고 나는 멍하다. 한참 후에 내가 묻는다. “이제 어떡해야 하죠?” --- p.47
“기분이 무진장 안 좋아, 여보.” 그녀가 코를 풀고 말을 잇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 나는 대머리에 한쪽 가슴이 데인 채로 이렇게 처박혀 있는데 당신은 가슴 큰 섹시한 여자들 틈에서 뛰어다닌다고 생각하니…….”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른 여자랑 어울리지도 않았다고. …… 갑자기 모든 게 쏟아져 나온다. 카르멘과 같이 술을 마시러 나가지 못하고, 외식도 못하고, 섹스도 못한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프랑크는 고개를 끄덕인다. --- p.129, p.131
외도는 별것 아니다. 여자의 몸이 관계되어서 그렇지 자위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연애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그때는 섹스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로 변한다. 이건 내가 늘 피하고 싶었던 일이다. 육체적인 외도에 대한 충동적 욕구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다른 여자들은 내 마음을 제외한 어디라도 손댈 수 있었다. 내 몸과 정신은 고독공포증일지 몰라도 내 마음만은 일부일처제를 지향했다. 내 마음은 카르멘 차지였다. 그녀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가 결코 연애를 하지 않았으리란 것을 로즈는 잘 안다. 2000년 봄, roseanneverschueren@hotmail.com, 본명 로즈, 별명 여신,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 보리스는 내 평생 첫 번째 혼외 연애 상대다. …… 관계는 마약과 비슷하다. 몇 주 안 지나서 나는 로즈에게 중독되고, 그녀가 내게 주는 감정에 중독된다. 최대한 짬을 내서 그녀와 같이 있으려고 노력한다. 바람을 피울 때 둘러대는 핑계란 핑계는 다 동원된다. 자주 ‘사무실에 일찍 출근’한다. ‘새 음반을 들으러 시내에 나가봐야’ 한다. ‘금요일 밤의 외출’을 이용한다. 아니면 아약스 팀의 홈경기. 그때는 집에 가기 전에 문자정보로 경기 내용을 확인하고 외운다. --- pp.185∼186
“우리 이혼해야 될까봐, 댄.”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혼이란 말이. 이제 상대팀은 내가 늘 불가능한 선택으로 제쳐둔 것을 제시한다. 그녀는 열린 골대 앞에 공을 놔둔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머리에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회사에 출근하려고 문을 나설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저녁 외출을 할 수 있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 로즈랑 같이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집에 올 때면 분위기가 어떨지 몰라서 얼마나 긴장되는지. 바로 이번처럼…… 얼마나 영원히 도망치고 싶어지는지.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있다. 이제 ‘그러자’고 말하면 이 냉랭함에서 해방된다. 친밀감이 부족한 데서. 암에서. “안 돼.” 나는 ‘안 돼’라고 말한다. 내가 ‘안 돼’라고 말하다니! “안 돼. 난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으면서! “맙소사.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더 자유롭고 싶어?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보라고!” 그래! 원하는 걸 말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겠어? 암이 없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나를 떨쳐내면 암도 떨쳐내게 돼.” 그녀가 건조하게 말한다. “아니, 난 당신을 떨쳐내고 싶지 않아!” 난 멍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게 진심인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 pp.215∼216
신트 루카스에서 항암치료를 한바탕 겪고 난 어느 저녁, 상황이 나빠졌다. 로즈에게 전화를 하니 집에 있었고, 15분 후 나는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로즈가 다독거려주었다. 다독임은 포옹으로 변했고 포옹은 섹스가 되었다. 그녀는 거부했지만, 무엇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결국 카펫에서 그러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 들어간 지 1분도 채 안 돼서 나는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는 같이 울었다. …… 하지만 작년의 연애와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지난 주 침대에서 뒹굴다가 갑자기 로즈가 그 말을 했다. “사랑해요, 댄” 미친 소리 같지만, 문제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마음이 흐뭇했다. 처음에는 정확한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미 ‘카르멘과의 언약’은 깨졌고, 이런 말이 상황을 더 어렵게 몰아갈 텐데도 흐뭇하다니. ‘사랑해요, 댄’이란 말이 그렇게 좋게 들린 이유를 깨닫자, 나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로즈의 사랑 선언은 내 자존심을 어루만져준다. 친구가 아니라 다시 남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이것은 집에서 느끼는 ?울뿐인 사랑에 대한 보상이다. 내가 박수를 받지 못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암투병을 할 때의 사랑은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로즈는 내가 즐기는 유일한 대상이다.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유일한 대상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 --- pp.259∼260
“더 이상 버틴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어, 댄. 이런 상태가 계속 돼야 한다면 어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 카르멘은 자신의 손을 쓰다듬는 내 손을 내려다본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지만, 마음에 담아둔다. “무슨 얘긴데?” 그녀의 의중을 이미 알지만 잠자코 있다. 카르멘이 말을 시작해 주면 좋겠다. “혹시…… 혹시 내가 다 끝내고 싶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또 자기 생각이 어떤지도.” “안락사를 뜻하는 거야?” --- p.338
잠시 후 그녀는 따끈한 물속에 누워 있다. 그녀의 눈에 기분 좋은 눈물이 고인다. 나는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서 비누칠을 해 카르멘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아아…… 정말 좋아.” 그녀가 눈을 감고 말한다. 몹시 고단하지만 마음은 뿌듯하다. 수건으로 깡마른 몸통을 살며시 닦는다. 발에서 다리로 올라간다. 사타구니에서 배로, 홀쭉해진 왼쪽 가슴을 닦고 나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오른쪽 가슴으로 옮겨간다. 그때 처음으로 풍만한 가슴이 있던 자리를 건드린다. 수건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 자리를 스친다. 카르멘이 눈을 뜨고 나직하게 말한다. “이리 와봐…….”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카르멘이 내게 키스한다. “사랑해.” 그녀가 속삭인다. --- p.364
화장실에서 이날 몇 번째인지 모를 토사물 양동이를 씻는데, 카르멘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댄! 빨리 와봐. 갑자기 오줌이 터지려 해…….” 어제 사온 성인용 기저귀는 기침과 웃음으로 인한 요실금에는 효과가 있지만, 진짜 소변은 감당하지 못한다. 나는 침실로 달려간다. “그대로 침대에 있어. 내가 변기를 대줄게.” 그녀가 겁에 질려서 외친다. “아냐, 못 참겠어. 아…… 나오려고 해, 댄…….” 나는 얼른 서랍장에서 수건 몇 장을 꺼낸다. 카르멘의 파자마 바지를 내리고, 수건을 두 겹으로 접어서 엉덩이 밑에 대고 한 장을 사타구니에 대고 누른다. 그녀는 수건에 소변을 본다. 나는 이렇게 여기 있다. 수건으로 그녀의 성기를 누르고……. 늘 흥분했던 그녀의 그곳. 수백 번도 넘게 키스했던 그곳. …… 이제 사랑하는 아내가 소변을 참지 못해서 내가 큰 수건으로 닦아주는 그곳. 카르멘은 창피해서 흐느낀다. “괜찮아, 여보.” 나는 그녀를 꼭 안고 사방에 입 맞춘다.
--- pp.35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