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에 미남으로 소문난 관노비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 윤곽이 뚜렷한 외모 덕에 멀리서도 뭇 여성들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는 소문이 난 박씨 노비, 줄여서 박비였다. 많은 양반집 마나님들이 박비를 탐냈다. 자신의 사노비와 바꾸길 몇 번이고 관청에 요구했으나, 관청에서는 단 한 번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모나 지력이 비상식적으로 월등한 사노비라든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사노비, 혹은 본래 신분이 양반이었어서 써먹을 데가 많은 사노비를 데려와도 박비와 바꿔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박비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 박비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술의 달인이다, 흑마를 허락받은 데다 화살을 메고 다니는 게 그 증거 아니겠는가 하는 풍문이 돌았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비가 흑마를 타는 건 그와 속도가 비등한 백마를 따라잡기 위함이었고, 활과 화살을 허락받은 것은 백마의 주인인 왈패의 경호를 위해서였다. 박비. 그는 누구 말도 듣지 않는 전라도 관찰사 이극균의 수양딸 이비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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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비는 그런 이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무나 소중한 것, 다시는 못 볼 것을 그리워하듯 까슬까슬한 손으로 몇 번이고 그 얼굴을 쓰다듬다 이비를 끌어안았다.
“살아야 한다. 반드시 너만큼은 살아야 한다.”
처음이었다. 박비가 이비에게 말을 놓은 것은,
“너만큼은 살아다오.”
그리고 이비의 이마에 입 맞춘 것은. 박비는 이비를 잔뜩 힘주어 끌어안은 후 늘 메고 다니던 활과 화살집을 풀었다. 이비의 등에 묶어준 후 말에 태웠다. 박비는 고삐를 한 번 쳐 말을 출발시켰다. 똑바로 앞을 향해 달리는 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지리산 도적의 땅, 어딘가 계곡에 신선이 산다는 그 땅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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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한 가지 묻겠어.”
“그리하십시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이번만은 용서해주겠다.”
이혈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비는 이혈과 눈을 마주쳤다가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며 손에 잡았던 그 몸을 놓았다. 눈앞에 선 이혈은 방금 전 소년과 다른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 보자마자 오금이 지릴 듯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그 꼴로 나타난다면, 네놈을 능지처참할 것이다. 저잣거리에 네놈의 몸뚱이를 서른 날 넘게 널어두고 삼족을 멸할 것이다. 네 조상들의 묘를 파헤쳐 그 목을 자르고, 뼈는 사방에 던져 들개 먹이로 쓰겠다.”
이제야 이비는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자신이 어떤 이를 상대로 감히 까불었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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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 속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존재했다. 양생과 처녀의 사랑, 홍생과 기씨녀의 사랑, 이생과 최랑의 사랑. 한데 그 사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랑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이 모두 그녀를 본떴기 때문이었다. 옹주,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그분. 꿈속에서만큼이라도 이루어지고 싶어 적었건만 김시습의 붓은 그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움직여 소설 속에서마저도 결코 닿지 않을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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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저절로 전하란 말이 나왔다.
“저는…… 소생은, 결코 저는 전하가 싫어 그런 말씀을 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게 정인이 있는 까닭입니다. 사연이 있어 헤어지긴 했으나 제 마음에는 늘 그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이는 그 누구 한 명 마음에 담을 수 없습니다. 하오니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이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비는 말하고 싶었다. 꼭 이 남자, 이 나라의 왕에게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때 물 한 방울이 이비의 얼굴로 떨어졌다. 이비가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고개를 들었다. 복숭아나무 아래 선 왕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왕이 울고 있었다.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왕은 이비를 끌어안았다. 단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가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 품이 너무나 따뜻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다음 순간 왕이 이비를 떼어냈다. 그 양손을 꽉 쥐고 두 눈으로 다정하게 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다 알아들었음이다.”
“전하, 저는…….”
“괜찮다. 다 괜찮다.”
이비는 가슴이 떨렸다.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이비는 그만 발뒤꿈치를 들었다. 왕의 입술에 입 맞췄다. 왕은 그런 이비를 물리치지 않았다. 이비를 꽉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비가 정신을 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다 도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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