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무엇에 관하여 썼을까? 주된 주제는 그가 ‘주체적 진리’ 혹은 ‘실존적 진리’라고 부른 특정한 종류의 진리였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주체적 진리는 가장 중요한 진리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 주체적 진리는 한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선택 등을 담고 있고,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적 진리를 중시했던 키르케고르는 애꿎게도 이에 대한 책을 쓰고자 하는, 즉,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을 자처했다. --- p.29
키르케고르의 작품은 지식의 모습을 한 비非지식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동시에 지식을 고소한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폭발해버린다. --- p.35
‘실존’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실존은 절대로 추상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은 가능한 모든 분석을 마친 후에도 남아 있는 ‘무리수’ 같은 것이다. 실존은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하는 분석 불가능한 잔재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을 두고 ‘잔에 든 맥주를 다 마시고 난 후 빈 잔 속에서 발견한 개구리 한 마리’에 비유했다. 대체 왜 거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뜻밖의 무언가.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 p.41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나면 양말에 난 구멍도, 셔츠가 재킷에 어울리는지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죽음을 주체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결정을 내릴 때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실존에만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실존의 미약함을 강조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주체적 진리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 p.51
불안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며, 욕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담은 자신이 신에게 반항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는 순간 이를 욕망하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두려워하게 된다. 자유로운 존재인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 p.69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육체와 정신 모두를 자기로 인식해야 하며, 둘의 조화를 이뤄내야한다고 믿었다. --- p.74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을 두고 인간이 살아가며 거치는 ‘삶의 단계’라 칭하곤 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실존 방식은 각각 독립적인 이상과 동기, 행동 양식을 갖춘 온전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 방식, 즉 준거 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심미적 실존은 윤리적, 종교적 실존에 비하여 원초적이다. 자신의 실존 방식으로서 ‘심미주의’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자세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과정 없이 심미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