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7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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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84쪽 | 486g | 130*205*22mm |
ISBN13 | 9791168123830 |
ISBN10 | 1168123836 |
발행일 | 2022년 07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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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84쪽 | 486g | 130*205*22mm |
ISBN13 | 9791168123830 |
ISBN10 | 1168123836 |
| 추천의 글 | 유진목 ·004 | 서문 | ·009 | 1장 | 뛰어내리기에 앞서 ·017 | 2장 |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071 | 3장 | 손을 내려놓다 ·121 | 4장 | 나 자신에게 속하자 ·169 | 5장 | 자유에 이르는 길 ·215 | 옮긴이의 글 | 김희상 ·266 | 찾아보기 | ·276 |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
-사르트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까? 죽음이라는 불청객이다.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어느 누구도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일상적인 그러니까 늙고 병들거나 아파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자살(suizid)을 선택하는 것은 비자연적(非自然的)인 죽음이다.
자살에 대한 거부감은 극명하다. 자살은 단단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한 흉터로 남는다. 흉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자살은 죽음을 담보로 하여 삶에 반항한다. 반항하는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삶을 질식시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성은 마비되고 탈출이라는 고통스러운 감각은 살아남게 된다. 여기까지 충분히 면죄부가 허용된다. 그럼에도 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피부에 와 닿게 되면 이상하게도 불편하였다.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자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우리가 제대로 인지 못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은 자살을 둘러싼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과다. 분명 어딘가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자살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살자에 대한 가혹한 상황이 전부일까? 자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일까?
그래서 ‘자유죽음(freitod)’을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는 고민이다 보니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살과 죽음은 죽음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서로 의미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과 죽음 사이에 자유를 놓고 생각하면 낯선 의문들이 생겨난다. 자살이 의미하고 있듯 자살은 자유의 영역이다 보니 자유죽음과의 경계선이 흐려진다. 나를 찌르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나이며 그런 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유죽음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
이렇게 자살과 자유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이 타당한 선택인지 선명해진다. 자유죽음을 택할 것이다. 삶의 무게감이 시시포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와 같더라도 살기 위해서 자살을 부정하게 한다. 그럼에도 ‘에셰크(echec: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를 구원하는 자유죽음이 이미 내 몸속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살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은 던지지 마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이다. 자살은 곤란한 질문이지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정말이지 곤란한 질문이다. 어쩌면 대답하기 어렵다고 해서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삶의 피곤함과 좌절감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이라는 침묵을 깨트리고 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음을 성찰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자살과 자유죽음을 둘러싼 수동과 능동의 관점은 자살자의 내면에 얼마큼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죽음은 자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삶의 밑바닥에 가려앉아 있는 죽음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만 하는 인생은 없다.”라고 하며 실존적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실존적 부조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 생명은 ‘없음에서 있음’이다. 이와는 달리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있음이 없음보다는 대단히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삶이 무슨 소용이라 말인가? 생명의 효율성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삶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오히려 생명의 올가미에 둘러싸인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명이 아닌 자유죽음의 관점으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가령, 운동선수는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운동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못 이겨 그토록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다. 물론 운동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길은 있다. 문제는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이유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운동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선수에게 삶의 가치를 호소하는 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다. 더구나 죽을 듯 살아가는 정신적 황폐함으로 무작정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개인의 희생양이라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된다.
자유죽음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정신착란이라는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죽음의 방식으로 ‘손을 내려놓는 것’은 타인의 의지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에 일어나는 죽음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자유인은 언제까지 살 것인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을 굳이 ‘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와 내 몸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까닭에는 ‘나’라는 것이 공간이라면 내부세계인 자아와 외부세계인 내 몸은 시간이라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손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보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이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득, 왜 자유죽음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이 아닌 자유죽음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혹은 삶의 부당함에도 구토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부조리에 맞서 저자는 자유죽음이라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말한다. 견디기 힘든 모멸의 순간, 마음의 문을 필사적으로 잠갔을 때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인간의 특권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특권을 대신할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만약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물에게 없는 부음(訃音)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진공상태가 아니라 집합체로 믿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살이 만연하고 있는 ‘자살문화’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죽음을 자살과 곧바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낙인이다. 자유죽음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느끼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죽음으로 뛰어내기 전 출구를 찾아 나선다. 자유죽음을 둘러싼 옳고 그름은 폭력적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유는 삶을 파괴하지 않으며 더더욱 자살을 응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저자의 묵직한 고백을 읽으면서 ‘자유죽음’이라는 네 글자가 죽음의 율법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는 자유죽음을 불청객이 아니라 친절한 손님으로 맞이하니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의 어느 순간에 자유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엄한 삶을 더 발견하게 되었다. 자유죽음이 결코 멀지 않았다.
문제 제기와 논쟁을 거친 후대에 태어난 특권과, 살면서 고착된 사적 세계관이 작동하는 틀을 너무 빨리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첫 일독은 저자의 문장들에만 집중하여 읽었다. 내용을 이해하고 흐름을 정리하고 주장이 탄생한 맥락을 살펴본다.
세미나 혹은 북클럽에서 함께 읽고 토론하면 가장 좋을 책이라서 혼자 읽자니 아쉬움이 컸다. 죽음을 통해 삶을 톺아보는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그 중에서도 자살이라는 방식은 삶의 존엄성과 함께 사유될 중요한 주제이다.
문명을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런 방식이 진화된 인간의 모습이라 여기면서도, 어떤 주제나 논쟁에 대해 불쑥 ‘자연스러움’을 끌어오는 주장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멸칭과 미덕이 혼재된 용어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당하지 않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거의 유일하게 소유하고 활용 전권을 가질 수도 있는 신체는 당사자에게만 온전히 속하는 권리이다. 신체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당사자 말고 누가 대신 결정해준다는 것인가. 그런 주장들은 월권으로 느껴진다.
다소 과격한 이 발언에는 자유와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옹호하려는 의도가 내게 강하다기보다는, ‘살해’에 대해 더 고민하고 것이 덜 위선적이라는 반발심이 있기 때문이다. 공사 영역 불문, 당사자의 의지에 반하는 살해가 매일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고 나가겠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으로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자유의지와 생명이 귀한 가치라면, 인간 사회에서 근절된 적 없는 살해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처벌하고 예방하는 일에 목소리를 먼저 보태야하지 않을까. 고령과 불치의 질환으로 존엄성을 잃게 되는 대신,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과 조력자들을 대단한 사회악인 것처럼 표적삼아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는 자살이 얼간이나 반미치광이가 저지르는 짓쯤으로 폄하한다. 단지 당사자의 닫힌 세계 안으로 사회가 들어가 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해보다 자살을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다. 좋게 보면 무지로 인한 오판이고 솔직하게 보자면 논리도 설득력도 타당성도 없는 헛소리다. 누가 더 멍청이인가. 정확하게 모르는 일에 대해 재빠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만이다.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성실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예의를 다 하며 살던 선배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어린 자식을 두고 베란다 창을 열고 삶을 멈췄다. 믿을 수 없었고 통탄스러웠지만 우리가 보일 반응이 자살을 선택한 행위에 대한 비난이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그저 애도했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몰라서 미안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었던 고통과 괴로움을 스스로 멈췄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기보다 못한 삶이라도 계속 살아야 한다고, 대책도 없이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아프고 괴로워서 나는 결론을 성급히 내렸을 수도 있다. 마무리를 하고 떠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치열하고 치밀하게 ‘자유 죽음’을 주제를 잡고 묻고 또 묻는 이 책이 무섭지만 반가웠다. 외면하던 것들을 마주봐야할 시간이 닥친 듯했다.
읽던 도중에, 방식은 자살이었으나 일말의 거부감도 생기지 않았던 분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 생일 한 달 전, ‘더 이상 먹지 않으려 한다’고 전하고, 아내 헬렌의 표현에 따르면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 평화롭게 떠나는 방식, 스스로 원한 단식, 자발적 죽음’을 선택했다.
존경하는 일본의 반핵물리학자 다카기 진자부로는 암투병 중에 산소호흡기를 자신의 손으로 떼고 ‘이제 그만하지’라고 하셨다. 진짜 전문가가 올바른 설명을 겸손하고 차분하게 하는 동안은 핵마피아들의 기세도 입을 다무는 듯해 늘 의지가 되었다. 죽음 직전에 남긴 메시지는 매년 다이어리에 새롭게 필사해둔다.
불과 작년, 친구의 어머니께서 병문안을 간 나에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잘 말해서 더 이상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그런 부탁을 하셨다. 연명 시도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하셨다. 다행히 가족들이 동의하여 귀가 후 며칠 간 편히 지내시다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모든 방식의 죽음을 거부하고 자살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개인과 사회의 이유도 ‘일리’는 있다. 다만 그 이유가 당사자에게도 합당한 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인구가 국력이라서, 종족 보전을 위해, 부도덕해서, 종교적 금기라서, 상담치료를 받지 않는 건 무책임하니까, 더 노력해서 열심히 살 수 있는데 게으른 선택이니까. 이런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명은 귀중하고 삶이 살만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일상에서도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살만하지 않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시스템이 작동 중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라,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거짓말, 사기, 선동이다.
퇴근하지 못하고 작업 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 병에 걸려서,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가정, 학교, 직장의 폭력으로, 노인이라서 아이라서 여성이라서 소수자라서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했나.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행복한 사람들도 늘어나길 바란다. 굳이 강권하지 않더라고 사는 일이 즐겁고 기쁜 경험이길 바란다. 누구도 제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 따위를 위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가 먼저 오길 바란다.
나는 인간의 수명이 짧아서 서글프고, 가능하면 감각과 기능을 상실하지 않고 오래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나에게 모욕을 감수하라고 강권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실망도 좌절도 잦았다. 현실은 갑갑하고 희망은 흐릿하다. 그래도 나는 역시 태어난 것이 기쁘다. 살아볼 수 있어서 기쁘다. 온전하게 오래 살아 보고 싶은 일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항력이 아니라면 죽음도 나의 자유가 온전히 발현된 선택이길 원한다.
기후학자들이 티핑포인트를 지나 회복 불가능한 골짜기로 떨어지는 - 그 순간부터는 모든 노력이 무용한 - 시기가 5-6년 남았다고 한다. 그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모든 고민은 무가치하다. 그럼에도 사는 동안 한 걸음이라도 바라던 방향으로 옮기고 싶다. 그 지향이 나와 우리의 삶과 죽음을 존엄하게 만드는 방식이라 믿는다.
내가 죽으면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세상, 눈만 감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세상, 찰나의 삶과 실재한다고 믿는 세상 중에 무엇이 신기루인지 둘 다 허망한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오늘도 태어난 새로운 동료들을 위해 간절히 바라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부조리한 삶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심어 놓은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신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안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를 단박에 비틀어버리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했던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Le faux, c'est mort)."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 이제 떼를 지어 나가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여러분의 정신에 명예 훈장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멍청하게 군다면, 침묵하겠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습지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습지대로부터 그저 몇 가지 소소한 자료와 그저 그런 이야기들 그 이상의 것을 환하게 밝혀내기 위한 준비 작업일 따름이다." (p.64)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는 독자라면 의당 '자연사'와 자유죽음(혹은 자살)' 사이에서의 윤리의식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자연사는 도덕적으로 옳고 자유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렇다면 자연사란 무엇인가? 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40대의 젊은 가장이 자연재해로 사망하거나 50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자연사인가? 그렇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60대의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정(주관적인 결정)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그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해야 하는가? 아메리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관습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로부터 습득한 죽음의 윤리에 의해 스스로의 생각을 말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험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p.254~p.255)
자유죽음은 아메리의 판단처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분명하지만 자유죽음의 과정은 충동자살이나 동반자살과는 구별된다고 믿는다. 자유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실행과 성공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말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는 것만 못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존엄을 포기하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의 결과는 그가 의도한 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삶의 안식과 평안을 원하는 이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얻는 것은 평안한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과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는 이 책에서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다. 그러나 공허한 결과에 대해 아메리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언제든 자신은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p.264)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장 아메리는 1976년 이 책이 출간되고 2년 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자살 옹호론자라는 오명과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아메리 역시 자유죽음의 무의미성과 당당한 삶의 길로 나설 것을 적극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자유죽음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말도 삶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실제로 자유죽음에 성공한 이의 경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이쪽 세상의 말이자 의미임을 절감하게 된다.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긴 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합리적'이라고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합리적'이란 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의미한 담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