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순은 옛날이야기나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자주 말했다. 두자는 언니들에게 ‘나중에’라던가 ‘이다음에’로 시작되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니들은 늘 지금 해야 할 것, 내일 아침에 해야 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루 좀 훔쳐라. 옥수수 좀 빻아라. 요강 좀 부셔라. 내일 새벽 일찍 산에 가야 해. 나물 삶은 건 절대 아버지 밥그릇에 담으면 안 돼. 장수 좀 업어라. 할머니 좀 모셔 와라. 두자는 언니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좋아하는 마음 곳곳엔 원망과 미움도 숨어 있었다. 그런 감정이 도대체 왜 생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언니들이 할머니처럼 무조건 아버지와 장수 것을 먼저 챙기는 것을 볼 때마다, 속 깊은 곳에서 눈물로 똘똘 뭉쳐진 잿더미가 울컥 올라와 목구멍을 꾹 누르는 것 같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특별하지도 귀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볼품없이 만들곤 했는데, 그건 언니들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도 싫었다. 그 때문인지 좋아하는 티 한 번 내지 못하고 살다가 언니들을 보내버렸다. ---p.25
나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해. 복순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기 엄마가 아침마다 니는 꼭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랬다. 자기 언니들도 결혼해서 모두들 현모양처가 되었다고 했다. 두자는 현모양처가 뭔지 몰랐다. 그저 결혼만 하면 저절로 되는 건가 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럼 우리 언니들도 모두 현모양처가 되었나? 두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복순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게 쉬운 게 아냐. 일단 좋은 집에 시집을 가야 돼. 그리고 꼭 아들을 낳아야 돼. 안 먹어도 배부르고 마른 땅에서도 곡식을 뽑아낼 줄 알아야 해. 절대 큰소리를 내어선 안 돼. 울고 싶으면 부엌에서 불 피울 때나 혼자 몰래 울어야 돼. 세상이 망해도 가족들 밥상은 삼시 세끼 차려낼 줄 알아야 하고. 복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자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게 어디 사람이나. 무당을 불러내 때려잡아야 할 귀신이지. 우리 언니들은 절대 그거 되면 안 되겄다. ---pp.25-26
손님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왔고, 수십 종의 담배와 술과 삼각김밥과 컵라면과 생수를 파는 동안 나는 내가 첫사랑의 이름을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말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 철렁, 하던 그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골대 위를 제외한 모든 하늘이 찬란하게 붉었던 그 여름의 저녁. 책상 밑 누런 박스 안에 포장된 그대로 들어 있을 전람회 앨범 역시, 머지않아 형체 없는 재가 되고 말 것이다. 숨이 막힌다. 삼만 초에 한 번 숨을 쉬는 블루 플라이처럼. 후웁. 후웁. 후웁. 그 애는 잘 살고 있을까? 군대는 다녀왔을까? 나를 기억할까? 내 이름을, 알고나 있을까? ---pp.53-54
두자는 변소 뒤에 쭈그려 앉아 날마다 질질 울었다. 시어머니의 심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두릉골에서 그랬듯 일만 열심히 했다. 시어머니는 두릉골의 엄마들처럼 제 아들과 남편만 떠받들고 며느리는 도둑놈 취급이다. 시집오는 날, 엄마는 나더러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새 인생을 살라고 했다. 좋아진 세상도 없고 새 인생 따위도 없다. 좀 덜 힘든 날과 좀 더 힘든 날이 있을 뿐이다. 딸도, 며느리도, 엄마도 되어본 엄마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괜히 더 서럽게. 정말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기대만 잔뜩 하게. ---pp.61-62
두자는 공비나 빨갱이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만큼 나 역시 그렇다. 안 그런 시절이 어디 하루라도 있었나. 두자의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 같고 지어낸 이야기 같았다. 가장 두렵고도 간절한 건 언제나 눈앞에 떨어진 오늘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일을 해야 되나. 또 치도곤을 먹지 않을까. 저 많은 빨래를 어찌 다 하나. 땔감이 또 떨어졌구나. 시어머니는 감자 한 알, 옥수수 한 톨, 김장독의 배추 한 포기, 무 하나까지 다 세고 사는 것 같았다. 도끼눈을 하고 두자를 감시하다가, 두자가 광에서 나오면 쪼르르 달려가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자기가 기억하는 것과 솥단지 속의 감자 개수가 반 조각이라도 차이 나면 두자를 잡아먹을 듯 족쳤다. 그런 와중에 본 적도 없고 소문으로만 겨우 들어본 공비를 무서워하고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총칼을 들고 사람을 해치는 공비가 천지 사방에 깔려 있다 하더라도 시어머니만큼 무섭진 않았다.---pp.61-62
두자는 울다 한숨 쉬다 훌쩍이길 반복하며 분녀를 따라 걸었다. 문득 제 인생이 간장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여겨졌다. 좁은 세상에 갇혀 그 바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짜고 어둡고 독한 맛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살아야만 하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감히 어떤 다짐을 내세울 수도 없는 존재. 남자와 처음 몸을 섞던 밤이 떠올랐다. 공장 창고 안에서였다. 어딘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댔다. 추위에 잔털이 와륵, 돋아났다. 청개구리 울던 밤도 있었다. 끈적끈적한 살갗 너머로 남자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꽃이 지던 날도, 있었다. 그땐 남자를 안고 태철을 생각했다. 남자를 사랑한 건 아니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가슴 뛰는 게 사랑이라면, 몸을 섞을 때마다 그 남자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노랗고 커다란 달이 뜨거나, 어느 집에선가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유독 외로웠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고 즐기는 밤.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몸 주위에 동그란 막이 둘러쳐지던 그런 날들. ---p.100
살아 있는 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원치 않는 상태.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겠지. 눈뜨면 일할 것이고 배고프면 먹겠지. 숨소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허기가 두자를 계속 살게 했다. 쌍둥이는 삶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끔찍하게 귀하지도, 사랑스럽지도, 목숨 같지도 않았다. 사는 게 너무 원망스러울 땐 쌍둥이를 때리며 소리 질렀다. 내가 니들 가졌을 때 확 죽었어야 했어! 니들 품고 못 죽은 게 천추의 한이다, 한! 쌍둥이는 두자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처럼 숨넘어가게 울면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자기들은 절대 죽기 싫다는 듯. 자기들을 죽이지 말라는 듯. 기분이 괜찮을 땐 쌍둥이를 안아도 주고 씻겨도 주고 가만히 앉아 그 생김새와 목소리를 보고 듣다가, 많이도 컸네, 하고 한두 마디쯤 던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쌍둥이는 서로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인생살이 어떤 건지, 굳이 안 살아봐도 다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pp.117-118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소리였다. 그 방에서 봉선의 편지를 읽거나 두서없는 생각을 마구잡이로 하다가 선잠에 빠져들곤 했다. 꽃씨처럼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꿨다.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딸도 아니고 수선이란 이름도 없이, 몸속엔 심장이나 내장이나 똥 대신 고운 봄바람만 가득 차서, 가고자 하는 곳도 가야만 하는 곳도 없이, 되는 대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꿈. 선잠에서 깨면 천장과 벽면의 모서리에 눈이 갔다. 서서히 자라나는 가느다란 균열과 누런 자국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시금, 여기가 어디더라. 나는 누구더라. 지금이 언제더라. 거짓말처럼 까맣게 지워진 지난날의 광야를 길 잃은 여자처럼 헤매고 다녔다.---pp.230-231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말을 혼자 지껄이면서 봉선은 눈물을 훔쳤다. 지긋지긋하다고 도망친 집. 채워지지 않는 마음. 남자의 침묵이 그리웠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리 되었나 싶다가도, 아니, 나보다 좋은 인생이 어디 있나 싶기도 하고. 엄마 사랑은 못 받았어도 남자 사랑은 많이 받았지 싶다가도,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사랑 아닌 줄 알았던 그게 진짜 사랑 아니었을까 싶고. 사랑은 그냥 말이고 글자지. 좋고, 애틋하고, 흥분되고,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밉고, 부끄럽고, 샘나고, 보고 싶고, 그런 것의 다른 말. 보고 싶은 수선이, 우리 엄마. 엄마를 떠올리면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고. 무섭고 불쌍하고 미운데 자꾸 생각나고. 이기적인 것보다 더 나쁜 건 이중적인 거야. 이기적인 건 최소한 정직하거든. 우리 엄만 단 한 번도 이중적이지 않았어. 엄마 때문에 이해하는 방법 대신 인정하고 체념하는 법을 배웠지. 그거, 어마어마한 재산이야. 좋은 사람 되는 것보다 나쁜 사람 되는 데 더 많은 용기와 외로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지. 내가 나쁜 년 해보니까 그거 하난 알겠더라. 안 그래? 다들 착한 척만 하면 나쁜 말은 누가 해? 누가 화내고 누가 야단치고 누가 관계를 끝장내지? 엄마는 늘 나빴어. 난 엄마 이해 안 해. 그래 난 썩을 년에 미친년이야. 나쁜 년. 헤픈 년이야. 나는 엄마 따위 절대 안 해. 자식새끼 있어 뭐해. 그딴 거 있어봤자 고생밖에 더 해? 이러나저러나 듣는 건 원망뿐이지……. 에이씨. 지랄 맞게 보고 싶네. 엄마, 수선이, 우리 엄마.
---pp.236-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