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8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240쪽 | 298g | 136*200*14mm |
ISBN13 | 9791187064893 |
ISBN10 | 1187064890 |
발행일 | 2022년 08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240쪽 | 298g | 136*200*14mm |
ISBN13 | 9791187064893 |
ISBN10 | 1187064890 |
1장 생각대로 살지 않으려면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 ‘마이너스’를 지향하기 동문서답의 정치 - 우아하고 통쾌하게 말하는 법 이론은 장례식을 거쳐 진보한다 - 새로운 앎을 만드는 횡단의 사고 ‘지금 여기’를 포착하는 선구안 - 지식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시작된다 “너의 위치를 알라” - 앎의 출발, 위치성 지식은 ‘발명’된다 - 종이 신문과 검색창의 차이 혼자란 무엇인가 -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말은 본디 칼이다 - 말하기와 듣기의 공중 보건 2장 파국의 시대,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는 착취하는 자의 언어로 말한다 - 욕망하는 자와 해방되는 자 공부는 변태의 과정이다 - 읽기와 이해하기의 차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 - 혼자, 둘이, 여럿이 하는 공부 ‘노아의 쪽배’까지 부수지 않으려면 - 인공 지능과 인문학의 융합? 융합은 관점이다 -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공부의 기준이 다양한 사회가 대안이다 - 영어 공부는 필요한가? 학교에 가면 공부한다는 환상 - 학교란 무엇인가 공부는 쓰기다 - 표절을 넘어 다운로드의 시대에서 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 주류 언어가 나를 삼켜버릴 때 - 우리에겐 자기 언어가 필요하다 소통은 불가능하다 -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서 하나, 여럿, 그 너머 - 다양성이라는 세련된 탈정치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기 - 새로운 말이 필요한 이유 모두가 억울한 ‘내 나이’ - 나이, 계급, 젠더가 뒤엉킬 때 환원주의, 매력적인 깔때기 이론 - 모든 이슈에 젠더가 동원되는 이유 4장 고정된 프레임을 넘어서 꿀 한 통을 얻으려면 지구가 필요하다 - 태초에 꽃, 꿀, 벌이 있었다 물과 기름을 섞는 법 - 절충은 융합이 아니다 오리지널 돈가스는 없다 - 우리말과 한글의 차이 우리는 있는 곳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 공간으로 사유하기 태초에 목소리‘들’이 있었다 - 흑서와 백서를 넘어 문명은 충돌하지 않는다 - 비교가 고정 관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프레임을 택할 것인가 - 프레임 이동의 정치학 |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빅 퀘스천을 던져 결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흔들리는 순간 잡아주는 언어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고 믿기에 이런 요소까지 정희진 다움으로 보게 된다.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나는 삶-글쓰기-사회의 관계와 연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별히 리베카 솔닛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아끼는 이유도 삼각구도가 탄탄히 서로를 받치기 때문이다. 겉돌거나 따로 놀지 않는 일체감과 질서 부여 감각이 믿음직하다.
저자는 ‘융합 글쓰기’라는 슬로건이 지식의 양이나 축적(‘더하기’의 이미지)으로 둔갑되는 현상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만능통치약 같은 융합과 통섭consilience 개념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공격한다. 정 작가에게 융합은 자기 가치관과 위치와 당파성을 발판으로, 이동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동이다. 한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작지만 새로운 세계’의 탄생 가능성에 주목하고 응원한다. 삶의 의지를 꺾는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은 삶을 설계하도록 안내하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언어를 목표로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떠드는 나열이나 짜깁기와 달리, 발언자의 철학과 비전이 맑게 투영된 언어는 밖으로 내민 손이 된다. 앞에서도 몇 차례 강조했듯이, 정 작가는 어설픈 뒤집기나 전체 맥락이나 역사를 모른 채 과격한 떠듦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counter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고 첨언한다. ‘전환(trans-) 혹은 의미의 도약’을 이룬 글은 우리가 아는 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는 “실천”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앎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 근간 다진 후 이동)(16)”라고 정의한다.
학업을 마치고도 주춤하는 내게 지도교수님은 배운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음은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 지구에 봉사해야 한다(19)”와 일맥상통할 것 같다. 저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쓴 끝에 이전에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글은,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19)”에 가깝다고 말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trans-former(이전의 것을 초월) 하라고.
다시 말해 저자에게 융합 글쓰기는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21)” 유사 창조행위다. 그런 글이 독자와 소통하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생산(20)”에 이바지한다.
추신. 가끔 보면 남의 어투와 표현력을 자기 것처럼 도용하는 사람이 있다. 남의 옷 훔쳐 입는 빙의 대신 너답게 말하는 연습을 하라 ~
9.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정희진
책을 읽는데, 책의 갈피갈피마다 새겨진 정희진 씨의 사유가 내 몸으로 흘러들어옵니다.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정희진의 사유와 내 몸에 새겨진 나의 사유가 만나서 폭발하며 펑펑 터집니다. 사유와 사유가 만나서 터져 나오는 폭발의 굉음, 폭발의 흔적, 갈등과 충돌의 흔적들이 책을 읽는 내내 제 몸을 감싸고 돌며 정신을 못차리게 만듭니다. 저는 그 흔적들을 갈무리하며 생각을 정리하느라 엄청난 정신의 에너지를 쏟아냅니다. 책의 파트파트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한 것 같습니다. 홀로 하는 내적인 대화의 장이라고 할까요? 정희진의 사유와 저의 사유가 만나서 행해진 무수한 사유의 흔적들을 서평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서평이 한 40개는 넘을 것 같습니다.^^;; 파트파트마다 다 서평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떨 때는 동의하면서, 어떨 때는 비판하고 반박하면서 새겨진 사유의 충돌들을 다 서평으로 쓰지는 못해서, 이렇게 크게 짧은 글 하나 남긴다는 비겁한 변명을 해봅니다. 이런 책 읽기는 너무 좋네요. 할 말이 너무 많고, 생각도 너무 많이 해서 에너지 소모도 크지만, 그만큼 좋은 경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책에서 말하는 융합이 아닐까요? 정희진 씨의 사유를 받아들이면서 내 몸의 사유도 변화해가는 과정이 읽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니까요. 뭐, 아니라면 할 수 없죠. 어디까지나 저만의 융합개념이기 때문에 다를 수도 있는데, 저는 이런 식의 변화과정이 융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나름의 융합 과정을 거쳤으니 이제 책도 덮고 글도 마쳐야 하는데, 제가 했던 무수한 생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버리는 건 너무 아쉬워서 하나 정도는 남겨보겠습니다.
종이 신문 읽기에 대해서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다가 정희진 씨가 종이 신문 읽기를 권하는 부분에 눈이 간다. 종이 신문 읽기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힘들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도대체 왜? 나를 둘러싼 삶의 구조가 종이 신문 읽기와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이건 내가 기독교를 믿거나 유신론자 되기가 힘든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나의 가족이나 친한 이 중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관계를 넓혀야 기독교인이 나오고, 그마저도 삶의 접점이 그리 크지 않다. 한마디로 나는 평생동안 신 없이 살아왔고, 신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내가 신을 생각하려면, 진짜진짜 억지로 관심을 가지고 신을 사유해야한다. 아니면 진짜 기독교를 믿게 하는 혁명적인 사건이 내 삶에 일어나거나. 이 확률은 기적에 수렴한다. 그나마 내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학이나 유신론, 무신론 관련 책을 읽어서 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면 나는 내 가족이나 친구들처럼 신 없이 살다 죽었을 것이다. 종이 신문 읽기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신문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 신문은 어른들의 도구였고, 나에게는 tv편성표나 스포츠 결과를 볼 때 잠시 보는 정도였다. 이건 시간을 거치면서도 똑같았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종이신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구독한 적은 당연히 없다. 구독이라고? 그건 부모님이나 나랑 나이 차이가 나는 윗세대의 이야기다. 나나 내 친구들에게 종이 신문은 자기 삶과 관련이 없는 매체였다. 학창시절을 거쳐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종이 신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종이 신문을 읽는단 말인가? 읽어 본적이 없고, 읽을 이유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읽어야 하지? 물론 책에 나오는 정희진 씨의 말은 옳다. 종이 신문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의 방식과 인터넷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의 방식은 다르고, 세상을 더 넓고 맥락적으로 보려면 종이 신문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의 방식이 필요한 것도 맞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종이 신문이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도 해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종이 신문 읽기를 하려면 나 혼자 해야한다. 불교의 수도승이 면벽하는 느낌이거나 기독교의 사제들이 깊은 수도원에서 홀로 수련하는 기분으로. 오롯이, 홀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한 번도 해본적 없는 걸, 책의 저자가 권했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을까? 여성학자로서 정희진 씨는 주류의 언어를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를 찾는데 소수지만 책이나 이론의 도움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종이 신문 읽기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친구들이나 지인의 어떤 이해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생각해보면 너무도 암담하고 힘겨워진다. 나는 종이 신문 읽기를 할 바에는 지금까지 해온 책읽기를 계속 할 것 같다. 종이 신문 읽기와 인터넷 매체 읽기의 차이를 살펴봐도 나는 종이 신문을 읽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인터넷 매체를 읽으면서 종이 신문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의 방식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게 훨씬 나을 방법일 것이라고 이야기 할 것 같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나중에 생각할지라도.
어쨌든 내게 너무나 힘든 종이 신문 읽기를 권하는 정희진 씨의 글을 보며 생각한다. 삶의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권하는 방식이 다른 거라고. 나라면 종이 신문 읽기를 권하지 못했을 거라고. 나라면 인터넷 매체와 종이 신문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방식의 차이점을 말하며, 인터넷 매체가 불러 일으키는 사유방식과 종이 신문이 불러 일으키는 사유 방식이 비슷해지게 만드는 방법을 한 번 찾아보자고 말했을 것 같다. 그것이 내가 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은 공부하는 아이다.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그녀는 항상 공부를 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더 많이 알기 위함이고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함이다. 관심을 갖는 분야는 다양해서 만나면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글도 쓴다. 독립출판으로 곧 자신만의 책이 나올 예정이다.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줄곧 그 동생이 생각났다. 이 책을 보면 좋아하겠구나, 어쩌면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희진의 책을 몇 권 읽다 말았다. 그러니까 어떤 책은 끝까지 읽지 못했고 어떤 책은 읽기만 했다. 읽으면서 좋았지만 그 좋다는 걸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그 훌륭함을 내가 망치는 글을 쓸까 봐 두려웠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리뷰 또는 감상을 쓰는 일은 한 편으로는 용기가 필요했고 한 편으로는 어떻게든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읽어야 한다고 추천하고 싶어서다. 아무튼 그렇다.‘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란 제목만 보며 글쓰기에 대한 안내서 같지만 이 책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공부 좀 하라는 내용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13~4쪽)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이든 명예든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든 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15쪽)
글을 쓴다는 건 가치관의 문제라는 것, 이 말을 오래 생각했다. 누구나 쓰고 누구나 읽고 원하는 건 뭐든지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 주저하고 어렵다. 무엇을 쓰는가, 무엇 때문에 쓰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럼 결국 쓰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게 뭔가를 알아야 하니까. 지금 내가 쓰는 건 이 책이 좋아서 그걸 알리고 싶은 거니까.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라는 부제가 있지만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쓰기와 공부다. 내가 모르는 걸 안다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모르는 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나에 대한 공부.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한나 아렌트 평전』 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공부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란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 이런 문장에서 그랬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란 결국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말. 정확하고 뻔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33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한 다음에 가능하다. 사실 대부분 인간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56쪽)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138쪽)
정체성을 찾는 사춘기도 아닌데 우리는 여전히 나는 누군인지 사는 게 뭔지 알지 못해 힘들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는 집중했던 적이 없다. 내가 있는 동네를 시작으로 점차 확장하면 지역사회, 국가, 세계까지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있는 이 작은 사회는 누가 살고 있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돌아볼 수 있다. 말하기와 듣기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나가 크게 정치 참여나 학교나 공공기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무슨 주의, 사상,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모든 개개인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니까. 개별성의 존중도 그만큼 필요하다. 그러니 융합이라는 것도 저자의 설명처럼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가 경험하고 그것이 퍼져 공동체나 함께 공부하는 도반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 지속적인 생산이라고 하는데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다면 공동체나 도반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이런 문장과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융합에서 중요한 건 갈등과 공명인 것이다. 새로운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필수과정이니까.
나는 내 몸의 역사다. 개인의 몸은 그 개별성 때문에 앎의 내용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과 합쳐지는 범위가 다르며 만들어지는 지식도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101쪽)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누구나 지녀야 할 가치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또 경우에 따라 갈등하거나 공명한다. (117쪽)
물론 지나친 갈등은 문제를 불러온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세대 간 간극은 어떻게 봐야 할까. 각자 경험한 시간이, 앞서 말한 것처럼 역사이므로 서로가 살아온 시대가 비교의 대상과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나의 일자리를 두고도 중년이나 노년이 청년의 그것을 빼앗는다고 말하는 분노하는 시대. 선거철이 되면 더욱 커지는 목소리들. 어떤 세대를 살든 그 세대에 한정된 삶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 역시 공부일 것이다. 돈이 되고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앎이라는 공부. 현재의 나이를 감당하기 위한, 인생을 살아가는 공부 말이다.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177쪽)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21쪽)
굳이 정치적인 이슈를 들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건 제대로 된 융합이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절충하는 게 편협한 태도의 융합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 있든 공부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고위 계층에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우리 사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니 공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공부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고 자신만의 언어, 새로운 언어를 찾아가는 일이다. 이 책으로 정희진의 글쓰기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마침내 쓰는 일은 중요하다. 나를 알고 나에 대해 쓰는 일, 모르는 나를 천천히 아는 나로 바꾸어 가는 과정, 그게 융합은 아닐는지. 진짜 글쓰기가 폭발하는 순간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