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가 차지하고 있는 몇 제곱센티미터의 공간에서, 우주 나이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잠깐 멈춰 서서 관찰자 자신을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한 포기의 풀에 대해 참인 것이 당신에게도 참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풀은 양성자 폭포에서 ATP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생화학 체계를 공유하며, DNA 속에 신중하게 기록된 유전적 이력의 상당 부분도 공유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당신과 풀이 공통조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풀의 친척이며, 한때 같은 종(種)이었다. --- p.9
소금쟁이 한 마리가 매끈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발을 수면 위에 디딜 때 수면이 움푹 들어가며 표면적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 에너지가 증가하므로, 물은 수면을 소금쟁이의 발을 밀치며 평평하게 만들어서 에너지를 줄이려고 한다. 이 힘을 표면장력이라고 하며, 소금쟁이를 물 위에 띄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덧붙여 빗방울의 모양이 동그란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 물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독특한 물질이라서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물이 생물학과 생물의 내부 구조(이 역시 수소결합에 의해 형성된다)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물을 이해할 때까지는 생물학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며, 많은 생물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다. 이것은 지구상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어디에나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인 듯싶다.’ --- p.37
분위기가 무르익어 에덴동산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우리의 공통조상이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주변의 모든 화학적 여건이 갖춰진 가운데, 그동안 개발해놓은 장비 일체를 챙겨 들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경이롭게도 오늘날 인간, 동물, 식물, 조류, 곤충, 세균, 고균의 살아있는 세포 안에는 모두 태곳적 공통조상의 흔 적이 남아있다. 우리 모두는 원시지구의 화학반응 세트를 지참하고 다니는데, 그 반응은 단순한 일회용이 아니라 동일한 생화학 기구에 의해 신중하고 꼼꼼하게 재창조되는 지속적·반복적 반응이다. 내 말이 충격적이어서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증거는 우리 모두의 몸속에 있다. --- p.95
다른 어떠한 물리적 특징보다도 생물과 세상 간의 관계를 좌우하는 것은 크기인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생물의 크기와 구조와 형태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진화가 아무리 자유분방하고 기발하다고 해도 자연법칙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먼 시계공이라 해도 물리법칙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장 큰 동물과 가장 작은 동물이 지구상에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물의 크기를 제한하는 법칙은 무엇이고, 그 법칙은 진화를 어떻게 제한할까? 마지막으로, 어떤 생물이 이 같은 협상 불가능한 물리적 한계를 향해 질주할 때 물리법칙은 그 생물에게 어떤 타협을 강요하게 될까? --- p.145
내가 「경이로운 생명」을 촬영하면서 알게 된 스토리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은 포유류의 청각이 진화한 과정이다, 그것은 세 가지 개념이 어우러진 아이디어의 대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전갈의 진동 감지 능력, 두 번째는 가장 원시적인 생물 중 하나(짚신벌레)에서 관찰된 이온 통로와 활동전위, 세 번째는 기본적인 음향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억 년에 걸쳐 뼈의 기능을 변화시킨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능력이다. 통합의 결과는 인간의 귀라는 멋지고 전문화된 청각기관으로 나타났다. 진화사를 자세히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귀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 p.199
다윈은 1862년 발간한 기다란 제목의 책에서, 40센티미터짜리 주둥이를 가진 나방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1년 후, 그리고 그가 예측을 한 지 40년 후 월터 로스차일드와 칼 조던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다윈의 예측에 꼭 맞는 나방을 하나 발견 했다. 사실 두 사람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나중에 한, 좀 더 정확한 예측을 인용했다. “그 나방은 박각시의 일종으로,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나방과 비슷한 것이다.” 다윈의 선견지명이 먼저 있었지만 그 나방의 학명은 합당한 절차를 거쳐 크산토판 모르가니 프라이딕타 Xanthopan morgani praedicta로 정해졌다. 여기서 ‘프라이딕타’ 는 월리스의 예측을 특별히 지칭한다. 그 대신 다윈은 난초의 또 다른 일반명에서 명예를 되찾는 데 만족해야 했다. 크리스마스난초는 오늘날 다윈난초라고도 불린다. --- p.228
일상적인 용어를 쓰든 전문적인 용어를 쓰든, 우리의 생물망은 혼돈 속에서 형성되었다. 세포내공생을 통해 진핵세포가 태어난 사건으로부터, 한 무리의 여우원숭이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모잠비크 해협을 건너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변화와 기회들이 무수히 누적되어 지구 자연계의 거대한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 영향을 미쳤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무한한 생명체로 발현되어 지구를 아름답게 수놓았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