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끊임없이 나에게서 밀려났고, 다시 밀려왔다. 어둠은 이토록이나 빠르게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그와 마찬가지의 속도로 끊임없이 나에게 밀려들어 왔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어둠. 그것을 밀어낼 수 없다면, 없는 거라면,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끝까지, 끝의 끝까지, 완전히 들어가 온몸으로 마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둠과 함께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이따금 약의 기운을 빌려 어둠의 안쪽으로까지 빨려 들어갈 적이면 차라리 행복했다. 여기는 이렇게 좋은데, 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빠져나와야만 하는 걸까. 외선에서 내선으로, 내선에서 다시 외선으로 순환해 나가는 전동차처럼 안과 밖을 끊임없이 돌고 또 도는 이상한 삶만 주어져 있는 듯해 나는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 p.60
내가 바라는 게, 그리 크거나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메르시에나 나스 같은 세계적 명성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는커녕 국내 업계의 조성아, 이경민 같은 자리에라도 오르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는 게 아니었다. 내 이름으로 된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한다거나, 유명 배우와 모델 들과 함께 메이크업 쇼를 개최한다거나, 더불어 학원을 차려 후배를 양성하는 권위적인 일 등은 아예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좀, 지금 여기만 아니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발 좀, 이렇게만 살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취직을 해야만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뒤 백화점 수입 브랜드 매장에 판매직이 아닌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말이다. 그게 내 유일한 꿈이라면 꿈이고,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 p.72
민수 형의 부인은 여자니까, 돈도 많고, 법적 혼인도 할 수 있고, 출산도 가능한 ‘여자’니까, 내가 민수 형에게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다 해 줄 수 있는 ‘여자’니까, 그나마 인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민수 형의 진실한 마음, 그리고 사랑. 그것만큼은 결코 여자가 차지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부분의 필요와 해결을 위해 여자와 결혼한 것은 참아 줄 수 있지만,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될 상대가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민수 형과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될 ‘남자’는 오로지 ‘나’여야만 했다. 민수 형은 내 남자니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니까, 나와 같은 ‘남자’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절대로 다른 남자에게 민수 형을 양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만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 p.93
‘홀을 탄다’라는 것은 마약 중독자들이 자주 내뱉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자취방에 삼삼오오 모여 약을 할 때면 다 같이 신이 나서 날뛰는 경우가 있고, 방 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묘한 헛소리를 내뱉으며 눈동자를 뒤집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싶어 툭툭 건드려 보면 그저 “나 지금 홀 타니까 건드리지 마.”라고들 했다.
그렇게 홀을 타고 난 뒤에 깨어나 나를 바라보는 형민의 눈동자에는 애절함과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이제 막 약에서 깨어난 뒤 조금만 더 하자고 애걸복걸하던 형민의 눈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거야? 나는 끝나지 않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데, 죽어도 끝이 아닌데, 왜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자꾸만 끝이 나는 거야? 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자꾸만 끝이 나고, 왜, 내가 싫어하는 안 좋은 현실만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왜?” --- p.105
그날만은 나 자신을 그토록 속이고 또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두려웠던 건, 은주처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만은 아니었다. 내가 도망치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그것은 죽음도, 에이즈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고 또 무서워했던 것, 그것은 바로 삶이었다. 죽도록 도망치고 싶지만 죽어도 도망쳐지지 않는 이 현실, 내가 서 있는 이곳, 나, 라는 인간, 나, 라는 인간의 더럽고 구질구질한 한 생애가 두렵고 무서워 이가 덜덜 떨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고,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위에서 나는 끊임없이 살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 있지 못했다. 나는 늘 잠들어 있었고, 죽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고, 당장 죽어 없어진다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순간만 자꾸 이어졌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또 자꾸만 살고 있었다.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었고, 돌아설 수 없었다. 돌이키고, 돌아선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 pp.175-176
와르르 전율이 일어나려는 찰나, 그의 붉고 어두운 입이 내 안에 쑥 들어와 있었다. 나를 집어삼키는 좁고 어두운 터널. 붙잡고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의 소용돌이. 어둡고 무서워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그 안의 심층부에 이르면 미치도록 넓고 따뜻해, 편안히 눈감는 듯한 아득한 안정감 너머에 나를 정말 죽이게 만드는 짜릿한 느낌. 더 깊이, 나를 넣어 줘. 빠져나오지 못하게, 완전히 밀어 넣고 놓지 말아 줘. 더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고 싶어. 때로는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지. 모두가 다 빈껍데기일 뿐 진짜인 건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여기는 이렇게 진실하잖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잖아. 이렇게 있잖아.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있고 싶어. 아주아주 조금이라도 더, 들어가고 싶어.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으면 안 될까?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이곳에 세계가 있잖아. 분명히 있잖아. 이렇게…… 있잖아. --- pp.187-188
돈을 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주말 밤마다 어둡고 시끄러운 클럽으로 모여드는 약쟁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돈을 주자마자 곧바로 약을 건네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음번에 만날 때 넘겨받는 경우도 있었다. 만날 약속 같은 것은 따로 정해 두지 않았지만 언제고 마주치면 어김없이 약을 건네주는 사람들이었다. 얼마든지 떼어먹을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돈을 떼어먹히거나 뜯긴 경우가 없었다.
약이란 잠시 내 몸에 머물다 결국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에 돈의 속성과 가장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것은 나를 기쁘게도 했고 슬프게도 했다. 나를 살게도 했고 죽게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돈이 나를 즐겁게 하는지 괴롭게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게 결국 내 몸에 젖어 드는 약물인 것만 같았다. --- p.199
때로는 자꾸만 화가 났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아닌데,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노력한 만큼 나를 봐 주거나 인정해 주며 받아 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럴 때면 곧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와 절망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곧 그와 같은 크기의, 아니 그것을 훨씬 넘어선 크기의 의지와 집념이 불타오르기도 했다. 현실이 고될수록, 잔인하게 등 돌릴수록, 나는 더욱더 커다란 오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거나 변호사나 의사처럼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누리는 엄청난 직업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화장을 하고, 그것으로 취직을 하려는 흔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유명해지려는 것도, 돈을 많이 벌려는 것도 아니었다. 민수 형 같은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거나, 또 다른 타인에게 기대 살아 보고 싶은 마음도 저버린 지 오래였다.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바라지 않고 그저 나 자신으로서의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충실해질 수 있도록 내 나름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 가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게 뭐라고, 뭐 대단한 거라고 문을 열어 주지 않는지,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나로서 살겠다는데, 부조리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저 나 하나 건사하고자 하는 일마저도 왜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실력이 있었고, 재능도 있었다. 취직만 된다고 하면 메이크업은 물론 판매까지도 얼마든지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꼭 한 달 안에, 나는 분명히 해낼 수 있었다. --- pp.214-215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살아남아서, 구원받고 싶었다. 죽음이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 그 자체로, 구원받고 싶었다. 발을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자리한 조그만 신경이 나를 타고 올라왔다. 움직이고 싶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오래전, 어머니의 몸을 찢고 나왔던 순간에도 나는 이토록 강렬히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잘 움직일 수 없었고, 나는 내 존재가 쏟아 내는 모든 힘을 다해, 손가락부터 움직여 나갔다. 다음에는 발가락을, 그다음에는 발을, 그다음에는 손을 움직였다. 나는 살고 싶었다. 움직이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고, 보고 싶었고, 듣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 p.232
가볍고, 따뜻한 어둠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래. 눈을 감으니, 어둠이 더욱 또렷이 보였다. 나는 민수 형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빛을 보기 위해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나와…… 이별하는 거야. 형이 아니라, 형과의 과거에 집착하고, 형과의 미래를 욕망하며, 형에게 매달리고 있던 나 자신과, 헤어지는 거야. 나는 어둠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둠이란, 결코 어두운 것이 아니구나. 사실은 너무나 밝고 따뜻해, 나는 그 안에 충분히 기대어 쉴 수 있었다.
어둠은 곧 하나의 공이 되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단단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작지도 크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어둠이라는 공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아주 작고 여린 모습으로, 제 몸을 감춘 채 가만히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
오래전 나는 아버지의 몸속에 있었다. 무수히 많은 생명과 함께, 숨과 함께, 그저 흐르고 있었다. 소리는 계속해서 흐르고 또 흘렀다. 나는 아버지의 소리를 온전히 다 듣고 있었고, 그의 몸에 흐르는 수많은 생명을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와 함께 숨 쉬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사람 안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계속 흘렀다. 기나긴 흐름의 시간 속에, 나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 언제고 어디서고, 생명이 내 곁에 있었고, 그것을 둘러싼 아버지의 생명 또한 단 한 번도 나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존재를 보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은 이 세계의 흐름 안에서, 나를 둘러 안고 있었다.
--- pp.254-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