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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254g | 133*200*20mm
ISBN13 9788954687843
ISBN10 8954687849

이 상품의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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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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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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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죽은 나무야. 물 안 줘도 돼요.
두 아이는 호스를 잡은 채로 멀뚱히 사장님과 내 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오후 햇살이 기울어진 채로 빈틈없이 내리쬐고 있었고 작은 무지개가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줘볼래요.
줘도 소용없어요.
살아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진 않을 텐데…… 줘봐 그럼.
사장님은 마치 혼잣말처럼,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고 아이들은 계속해서 그 나무에 물을 주다가 근처에서 한창 자라나고 있는 다른 작물들에도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 pp.35~36

주차장엔 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빈 의자들이 있었다. 가죽은 이미 오래전에 다 벗겨지고 없었고 뼈대도 낡을 대로 낡아 있었으나 종종 모자 쓴 노인들이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전에 우경과 함께 살던 집의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고는 했다. 전화번호는 저장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에서도 저에서도 전화를 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안면을 익히며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그립다는 것인가, 그리운 것은 어쩌면 고마운 것과 닮아 있구나 생각했다.
--- pp.65~66

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어려운 거네요.
뭐가요?
평범하게 지내는 것.
유진씨는요?
저도 그런 편이에요.
좋네요.
--- p.77

나는 숨을 참으면서 테이블에 놓인 내 몫의 주스를 마셨다.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혼자서는 어려웠겠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 몫의 건강주스를 만들어 집을 나섰다.
--- pp.82~83

어머니는 그 깨가 눈에 들어온 순간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해인씨가 그래도 깨를 뿌린 음식을 한 번은 먹었구나. 깨라는 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 뿌리려면 안 뿌릴 수 있는데,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도 아니라면 해인씨가 뿌렸든 남이 뿌렸든 어쨌든 깨를 뿌린 음식을 먹긴 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는 것. 집에 가서도 얼마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방 한구석에 떨어진 깨를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아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 깨라니. 그 얘길 전해들으면서 어쩐지 시시하다 생각했고 참 슬펐습니다.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 p.124

우경이 두고 간 자전거는 아직 그대로 공터 한편에 세워져 있다. 요즘 나는 잠이 좀 줄었으며 겨울이 오는 게 조금 두려운 정도의 마음이다. 한 번, 조금 운 적이 있었고 이렇게 자주 비가 내린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매일 비가 내리는 날씨가 이어졌다. 매장은 가을에 조금 바쁘다가 날이 쌀쌀해지면서 한동안 무척이나 한가했는데 사장님은 한가하면 또 한가한 대로 좋다는 이야기였다.
--- p.171

환희야, 너 깨 잘 터니.
네.
그거 어떻게 잘해?
잘할 수 있으니까 잘할 수 있어요.
그렇구나.
네, 저는 개미도 키우고요, 모충도 좋아하고요, 또 춤도 잘 추고요, 영어는 배우는 중이고요.
즐겁겠다.
근데 슬퍼도 괜찮아요.
왜 슬퍼도 괜찮아?
슬퍼도 괜찮으니까요.
--- p.181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만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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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주란의 소설을 사랑한다. 그의 소설은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 ‘도―’라는 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고, 연노랑으로 그린 핏물 같고, 발 없이 멀리 가는 구두 한 켤레 같다. 내가 잘 아는 세계, 잘 아는 사람이 오래 지켜온 비밀을 모아둔 화단 같다. 이번 소설의 인물들은 새처럼 조금, 지저귀듯 말하고 초식동물처럼 천천히 오래 먹는다. 날씨와 식사, 수면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돌보는 일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돌봄이다. 이주란이 만든 작고 가벼운 종이배 위에서 내리고 싶지 않다. 슬픈데 한 톨의 격정도 없이, 기어이 순해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깨끗해진 기분이다. 누군가가 나를 씻기고, 먹이고, 재운 것 같다.
-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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