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정초에 본점 연회장에서 경영진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세운 새해 경영 목표와 아호를 붓으로 정성껏 써보는 ‘휘호(揮毫) 행사’를 개최했다. 사업본부의 임원 각자에게 주어진 한 해 동안의 경영 목표 달성 의지를 담은 사자성어나 짧은 글, 그리고 아호를 저마다 직접 쓰게 하고 낙관(落款)으로 마무리한 뒤 차례로 돌아가면서 자기가 쓴 글의 뜻과 각오를 밝히도록 하는 행사였다. 내가 알기로, 이는 은행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기업에서도 결코 흔치 않은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붓글씨를 써본 경험이 있는 임원이 몇이나 되겠으며, 설령 써봤다 하더라도 대부분 수십 년 전 학창 시절에 몇 번 써본 것이 전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터라 우리는 명망 높은 서예가 두 분을 초빙해서 원 포인트 레슨을 받기도 했다. 모두 처음엔 당황스러워했으나 이내 적응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당시 그 이벤트에 참여한 모든 임원에게 2011년의 휘호 행사는 분명 신선한 체험의 시간이었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특별한 일이지 않았을까. 조용히 먹을 갈면서 그 향을 몸소 느껴보고, 붓으로 한자(漢字)나 한글을 정성껏 써보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하고도 가치 있는 체험이리라.
당시 나는 두 가지 기본 취지로 ‘휘호 행사’를 기획했다. 첫째,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 해 사업 목표 달성의 각오를 다져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그 기회를 활용해서 임원들 각자가 자기 아호를 하나씩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임원 상호 간 호칭을 은퇴 후에도 현직 때의 직급이나 직책으로 부르게 될 터인데, 난 그것이 조금은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서, 당시의 동료들이 은행을 떠난 뒤 서로를 아호로 부르면 나름대로 운치도 있고 인간관계에도 도움 되리라 믿었다. 실제로 은퇴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요즘 우리는 모두 자연스럽게 서로를 아호로 부르고 있다. 전화할 때나 문자 보낼 때, 대화할 때 아호를 사용하다 보니 심지어 본명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을 정도다.
--- pp.15~17
2010년 12월 안성연수원에서 신임임원 워크숍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신임임원들이 각자 소감과 각오를 말하는 시간이었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그 순간, 불현듯 죽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인 것 같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나의 아내 영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늙었을까? 지금 그녀가 내 앞에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당신, 죽기 전 제가 부탁한 일들을 잘 지키고 있나요?’라고 묻지 않을까? 아내를 둘러싼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그리움과 설움이 복받쳐서 서럽게 울 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2021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 보니 그녀와 함께 살았던 기간과 엇비슷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한동안 말썽을 부렸던 아들 녀석들은 둘 다 결혼하여 자식 낳고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많은 분이 내게 ‘이젠 재혼해야 하지 않냐?’라며 진심으로 걱정해주지만 나는 아내가 내 곁을 떠난 뒤 한 번도 재혼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의 모든 열정과 사랑을 내 아내 김영란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15년 넘게 소중히 간직해온 그녀의 옷과 신발,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 둘이서 주고받았던 500여 통의 편지를 모두 불태웠다. 이젠 그대 그리고 나의 눈물을 닦을 때이기에. 비록 불태운 일기장에 적혀 있던 33년 전 아내가 꿈꾸어왔던 ‘소망 속 노후대책’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지만…….
--- pp.29~31
산책 사랑으로 유별난 영국인들은 사람은 드나들고 가축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장치된 산책로 입구를 ‘키싱 게이트(kissing gate)’라고 부른다. ‘입술을 살짝 대다’라는 이름처럼 실제로 영국인은 키스의 시작 같은 설렘으로 이 문을 열고 산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시골길 산책은 목초지, 날아가는 새, 풀 뜯는 말, 부드러운 바람과의 친절한 만남을 선사한다. 나뭇잎 사이로 투영되는 햇빛을 느끼며 걷다 보면 가끔 작은 마을도 지나간다. 마주치는 주민들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넨다. 길을 걸을 때는 시간의 질도 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곳을 또 걷고 싶어 한다. 다시 예전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서 순례길에서 경험했던 ‘나 혼자만의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길 위의 순례만 순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내 삶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순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 pp.43~44
2002년 10월 24일, 영국의 여성 교육부 장관 에스텔 모리스는 능력 부족을 이유로 스스로 사직했다.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가 극구 만류하였으나 내각이 필요로 하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떠나겠다며 자리를 내놨다. 총리는 정말 교육을 깊이 생각하며 극도로 정직한 사람이 품위와 성실을 지키면서 사임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무능해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자리를 내놓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중요한 자리를 맡는 사람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 내가 이 자리에 적합한가?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그런 능력이 있나? 의지와 열정은?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은 없나? 내가 맡는 것이 조직에 최적일까? 등등 스스로 질문을 해보고 확신이 서야 한다. 이처럼 치열한 삶을 사는 이는 극히 드물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자리에 맞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맡을 수는 없다. 자리에 적합한 능력과 경험과 바른 생각을 갖춘 사람만이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개선하고 추진할지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리만 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조직의 발전을 더디게 또는 뒷걸음질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살아남는 시대다.
--- pp.113~114
그러나 『호모데우스』가 출간되고 2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코로나19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으며 대응하고 있음에도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전혀 수그러들 기미 없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가 욕망의 끝을 모르는 인류의 뒤통수를 호되게 한방 후려갈긴 셈이라고나 할까.
세계 각국에서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여 이미 일부 국가에서는 접종을 하고 있으니 코로나19 팬데믹도 언젠가 극복되거나 다른 전염병들처럼 인간의 통제 범위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인류(또는 모든 생명체)의 영원한 과제로 여겨졌던 기아, 전쟁(폭력), 질병(전염병)을 어느 정도 해결했으며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두었다는 선언은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세상보다는 신의 영역 또는 불가지 영역이 많은 세상이 오히려 좀 더 인간답고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가 애절한 목소리로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에서 한 말
“왜 태양은 계속 빛날까?(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왜 바다는 해안을 향해 돌진할까?(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라고 노래 부를 때 태양이 계속 타오르는 이유나 바닷물이 해안가로 계속 밀려드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연한 여인이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의 감성을 공감하는 것이 한결 위로가 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인의 시가, 뮤지션의 노래가, 화가의 그림이 과학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숨 쉴 구멍’과 ‘삶의 여유’를 되찾아주는 게 아닐까.
--- pp.204~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