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티베리우스는 7개월, 동생 가이우스는 2년의 활동 기간밖에 갖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동안 실행된 개혁들은 거의 다 물거품으로 끝나버겼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줄곧 성장의 길을 걸어왔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의 접어든 로마에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존재이유다. 로마인들도 그후 우려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세운 이정표에 따라 길을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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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융성이 개인의 힘이 아니라 체제 덕분이라면, 혼란도 개인의 역량이 쇠퇴한 탓이 아니라 체제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은 분명히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그라쿠스 형제가 로마인에게 남긴 것은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 p. 79
동등한 권리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동등한 의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등한 의무를 부과하고 싶으면 동등한 권리도 주어야 한다. 권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요구하면 내정 간접이 된다. 로마 시민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형제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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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의 형제시대부터 시작된 로마의 혼미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단정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인들의 사치나 퇴폐에 그 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고뇌였다.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혼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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