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2등이었지만, 유리는 누구보다 당당한 1등처럼 보였다. 죽도록 공부해도 2등에 머물렀고, 책 한 번 휘리릭 넘기는 김정호가 늘 1등을 차지했지만 한 번도 그녀가 억울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새연도 그때가 떠오르는지 말을 꺼냈다.
“너 기억나?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하고도 유리는 항상 너에게 1등을 뺏겼었잖아. 그래서 내가 물어봤던 것. 김정호만 없으면 네가 1등일 텐데, 정호 안 밉냐고. 질투 안 나냐고.”
“기억나지.”
“나도. 그때가 정말 생생하게 기억나. 뭐랄까. 같은 여자고, 친구지만, 내가 유리에게 반했던 순간이라고 해야 되나.”
새연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던 유리를 기억했다.
‘정호가 왜 미워? 정호는 정호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고,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하는 건데. 남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나는 지옥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 지옥으로 몰아넣으려던 것은 정호 자신이었다. 제게 부딪혀 절망을 느끼길 바랐던 철없는 마음이었는데. 유리는 그 안으로 발 한 짝도 담그지 않았다. 꿋꿋하고 의연했다.
유리가 원하는 건 1등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라이벌이란 없었다. 경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부욕이 없었을까. 아니, 그녀는 늘 불타오르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가 라이벌인 셈이었다. 10대인 시절에 이미 상대적 가치를 시원하게 무시해버렸다.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진리를 알고 있었다. 세상에 어느 열일곱 살 소녀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경쟁과 등수에서는 초연해질 수 있을까.
“유리가 또 뭐라고 했었더라. 1등이 문제가 아니고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공부하는 거라고 했었나.”
“그랬지.”
정호는 또 한 잔 삼켰다. 투명한 술이 가슴속을 찌르르 울린다. 유리에게는 확실한 꿈이 있었다. 무지개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길에는 오로지 절대 가치만이 존재하였다.
‘결국 완전히 다 패소하고 마지막 판결이 있던 날, 엄마는 나랑 유찬이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나도 울고, 유찬이도 울고. 사실 그 재판에서 이긴다고 죽은 아빠가 다시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 그날 유리가 처음 얘기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병원 측 변호인단이 어마어마했어. 그렇게 들일 돈이 있으면 차라리 우리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줬으면 좀 좋아. 사과할 상황은 절대 안 만들겠다고 변호사들에게 돈 쏟아붓는 거 보니 피가 거꾸로 솟더라. 그에 비해 우리가 선임한 변호사는 다른 일에 치여서 그야말로 대충 대충인 거야. 어차피 이건 안 될 싸움이라는 걸 알았겠지. 나, 그때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어. 살면서 다시는 억울한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돈 앞에 억울해지는, 이런 개 같은 세상. 제대로 살아가려면 내가 먼저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공부해야겠다. 한국대 가야겠다. 법대 가야겠다. ……변호사든 뭐든 되어야겠다. 내 힘으로 엄마와 유찬이를 지켜야겠다. 부둥켜안고 우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니 그녀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목표가 있으니 앞만 보면 되는 것이었다.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혹은 10등을 하든 상대적인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국대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변호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김유리는 감히 제 손 위에 올리고 괴롭힐 미물이 아니었다. 정호는 그녀를 이기겠다는 생각을 그날로 버렸다.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싸움이 될 리도 없었다. 늘 유리보다 한발 앞서서 가볍게 1등을 차지했지만, 정호는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진정한 1등인 적이 없었다.
정호는 후우우,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이 온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심장이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어젯밤 같이 있었다가 아침에 보내줬는데도, 안 본 지 겨우 12시간밖에 되질 않았는데도, ……보고 싶었다. 유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14년을 봐왔는데도, 그렇게 그녀가 그리웠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 모든 감정까지 다 던져버리고, 유리 앞에 나설 수 없게 했다고 생각했던 상황들까지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그냥 남자가 되고 싶었다. 친구라는 이름을 떼어버리고, 남자로 서고 싶었다. 그래서 가슴이 지독하게 아파왔다. 술은 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건 모두, 술 때문이었다.
--- 본문 중에서
“넌 가만히 있어도 비싼 차, 비싼 집, 비싼 옷이 눈앞에 뚝뚝 떨어졌겠지. 부잣집 아드님으로 살아와서, 뭐가 부족하고 뭐가 간절한지도 모르겠지만. ……게다가 뭐든 한 번만 보면 사진 찍은 것처럼 눈앞에 다 펼쳐지는 천재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자를 머리에 밀어 넣고 또 밀어 넣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지만! 김정호, 나는 말이야.”
“…….”
“내 전부를 걸고 악착같이 매달려온 그 하나를 절대 놓지 못하겠어.”
신념.
기나긴 시간, 어렵게 달려온 길 속에 그녀가 붙들고 있었던 단 한 가지.
……(중략)……
“나랑 결혼하는 게, 너한테는 신념을 무너뜨리는 거고, 인생을 짓밟히는 일이야?”
“누가…….”
“그래, 네 말대로 나 부족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한다는 게 뭔지도 몰라. 숨만 쉬어도 살아지니까 그냥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지금 네가 목숨처럼 여기는 그 신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
“야, 너 지금 그런 말이…….”
“그래! 이런 말이 나온다! 젠장, 나는 네 앞에서 고작 이런 말이나 하고 있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럼!”
서로를 향해 뻗은 손은 더 이상 따듯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이 심장을 긁어대고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에 손이 찔려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꺼내려고 했던 반지는 지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반지가 닿아 있는 부분이 저릿하기만 했다. 상처는 그날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사랑을 하게 된 지금 이 순간이 잔인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하나만 묻자. 너는 그게 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해?”
유리는 그저 말문이 막힌 채로 정호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헤어진다니. 그걸 원한 건 아니다.
“네 신념은 그렇고 고귀하고 대단한 거고, 내 사랑은 하찮은 거야?”
“누가 꼭 그렇대!”
“나한테는 김유리 네가 내 목숨이야!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내 인생에 의미있는 건 너 하나야. 지금까지 쭉 그래왔어. 나를 주저앉힌 것도, 나를 일으킨 것도, 전부 다 너였다고.”
“…….”
“너랑 세상 전부를 바꾸라고 해도 나는 너를 선택해! 그런데 너는?”
고백은 절실했고, 간절했고, 뜨거웠으며, 날카로웠다.
원치 않은 답을 품고 있을 그녀를 바라보며 여전히 절망 어린 입술을 움직였다.
“너는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애초에,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유리,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사람이 아니지.”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 부딪혀 있던 정호가 쓸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도 오래 외면했다. 힘든 인연으로 얽혔다는 것을 안 순간 놓아버렸어야 했는데. 친구의 탈을 쓰고 주변을 맴돌던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신념이 대체 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빌어먹을 그 신념을 가진 너니까 내가 사랑한 건데…….”
“…….”
“이제 와 포기하면 안 되지. 그래, ……포기하면 내가 사랑하는 김유리가 아니지.”
아픈 깨달음이었다.
평행선 위에 놓인 두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