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실장님!”
J미디어 영화사업본부 내에서 남자 못지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유명한 제작팀의 라인 피디 정 피디가 큰 소리로 경진을 부르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경진에게로 향했다. 머쓱해진 경진은 계속 식사하시라는 듯 손짓을 하며 신이 나서 달려오는 정 피디를 향해 애써 환하게 웃었다.
“어, 정 피디, 오랜만이야.”
“실장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넌 현장에 있고 난 외근을 많이 하니까 못 보는 게 당연한 거지……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경진은 그냥 웃음으로 때웠다. 사실 정 피디는 경진이 회사에서 말을 트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특유의 친화력과 수다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경진은 정 피디와 친해질 일이 퇴사하는 그날까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경진도 흘러 다니는 풍월을 주워 들은 바 있다. 이경진 실장, J미디어 내에서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 겉으로는 웃어도 속은 알 수 없는 사람. 뭐, 그렇게까지 거하게 표현할 정도로 미스터리한 사람은 아닌데, 사람들의 의견은 대부분 그러했다.
“요리 맛있죠? 저분이 직접 다 한 거래요. 이름이 뭐라더라…… 앙드레였나? 다니엘이었나?”
“다비드.”
“아, 맞아, 다비드. 어, 근데 실장님은 어떻게 알았어요?”
“지난주에 친구랑 카페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
“오올. 아무튼 저분이 본부장님 남편이랑 같이 동업을 하는 분인데요, 지금 여자친구도 없고 게이도 아니래요.”
정 피디는 뭔가 굉장한 고급 정보를 너에게만 특별히 준다는 듯이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경진은 또 한 번 웃어버렸다.
“어, 그래, 그렇구나.”
경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힐끔 그를 보았다. 곁을 지나치는 사람을 그냥 두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고 웃어주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그 순간,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쩌지. 아니, 어쩌긴 뭘 어째. 저 남자랑 눈 마주친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나?
침을 꼴깍 삼킨 경진은 태연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 정 피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이보다 더 어색할 순 없었다. 경진은 괜히 손끝으로 입술을 닦으며 불쑥 내민 그 남자의 악수에 응했다. 그사이 정 피디는 잔망스럽게 웃으며 저 멀리 떠나 버렸고, 그 남자와 단둘이 마주 보고 선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그는 무척이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요리는 입에 맞으신가요?”
“아, 예. 맛있게 먹었어요. 요, 요리를 무척 잘 하시네요.”
빌어먹을. 왜 말은 더듬고 난리야.
볼이 화끈 달아오른 경진은 이대로 저 밑 땅속으로 꺼져버렸으면 싶었다.
“다행이네요. 샴페인 한 잔 드릴까요?”
“아뇨. 제가 금주 중이라.”
“금주?”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혹시 못 믿는 건가? 속으로 웬 내숭, 이런 생각을 한 건가?
“안 마신 지 몇 년 됐어요.”
“아, 금주.”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금주를 못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다비드라고 합니다.”
자기 입으로 직접 다비드라고 하니 거참, 어깨가 부르르 떨릴 만큼 간지럽네.
경진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미소를 지었다.
“전 이경진이라고 합니다. 본부장님 회사에서 일해요.”
“저 그거 한 장 주세요. 그거, 이름이랑 연락처 적힌…….”
“아, 명함이요? 잠시만요.”
설마…… 명함도 모르는 건가? 이 남자, 백치…… 미도 있네? 역시, 신이 이 남자에게만 몰빵한 건 아니구나.
“저 이경진 씨 본 적 있어요.”
“네?”
“얼마 전에 이사 오셨죠?”
“……네.”
“아침 5시 반에 조깅하고.”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그 시간에 출근하거든요. 저는 일주일 내내 경진 씨 봤는데, 경진 씨는 저 못 보셨어요?”
“아, 그러셨구나. 하하.”
그래서 날 반가워해줬던 거구나. 그나저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눈에 안 띌 수가 있지?
멋쩍게 웃던 경진은 핸드백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근데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지난 일주일간 궁금함에 잠 못 들게 했던 그것.
“진짜로 이름이 다비드예요?”
“네, 다비드예요. 풀 네임은 다비드 고메 아를렌. 제가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그는 이름뿐 아니라 성까지 프랑스인 같았다. 더 캐묻는 건 실례일 것 같아 경진은 충분한 대답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이도 처음엔 제 이름이 다비드라고 하니까 비웃더라고요. 근데 다비드란 이름이 프랑스에선 무척 흔한 이름이라서…….”
그의 부가 설명에 살짝 찔렸지만 경진은 태연하게 웃으며 당신의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름에 관해서라면 경진 또한 여성스럽지 못한 이름 때문에 어렸을 적엔 이름 바꿔달라고 떼를 쓰는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이름에 얽힌 고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국말을 9년째 배우고 있긴 한데, 선생님이 너무 부실해서 많이 어설퍼요. 저 바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아, 예.”
금주를 못 알아듣고, 명함이라고 단번에 말하지 못했던 게 한국말이 서툴러 그런 것이라면…… 이 남자는 정녕 신이 몰빵을 한 건가? 저 정도면 세상 살 맛 나겠네.
“오늘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해요, 우리.”
경진은 깨끗이 다 비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뭔가 묘한 사람이었다. 부담스럽진 않지만 편하진 않고, 눈을 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자꾸 시선이 가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랄까.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낯설면서도 즐거운 이 관심이 언제까지 계속될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생각보다 꽤 반가울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