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
“미묘하게 평범한 맛이면서, 또 향은 엄청 풍부하네? 뭐야, 이 커피?”
“실험실에서 재배된 커피래. 농약도 안 쓰고 물도 엄청 안 쓴대.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한테 평가해달라고 샘플을 보낸 거야. 뭐라고 평가하지? 맛있는 원두들을 아무렇게나 막 섞은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가을 씨가 쓰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였지만, 가을 씨도 나도 언제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커피는 열대우림을 파괴했고 환경을 오염시켰으며 현지 사람들은 커피를 생산해내느라 식량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하곤 했다.
“……과찬하자. 아주 아주 조금만 과찬해버리자.”
---「10시, 커피와 우리의 기회」중에서
엠제이가 시트지를 붙이는 모습은 천수관음보살 같았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확언대로 근사했다. 만족한 엠제이가 가장 높은 곳의 찬장에서 샴페인 잔을 꺼냈다. 꺼내다가 하나를 떨어뜨렸지만 깨지지 않았다. 그 잔들은 투명한 실리콘으로 만든 것으로, 아무렇게나 막 쓰기에 좋았다. 어차피 잔에 따를 것도 제대로 된 샴페인은 아니고 창고형 매장에서 사온 캔 와인이었다. 우리는 박탈당한 세대였고, 세계는 우리에게서 박탈한 것을 영원히 돌려주지 않을 것이며, 그 단호한 거부로 결국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한계 속에서 감각만이 반짝이다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테라스에서, 끝나가는 세계를 향해 건배」중에서
“그렇지만 고통을 느끼는 건 교감 로봇뿐인걸.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야.”
밸런타인 씨가 저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제한되는 종류의 교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한 적은 없지만요. 함께한 몇 년간 밸런타인 씨에게 팔베개를 해드리거나, 밸런타인 씨의 머리를 땋아드리거나,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것 이상의 교감은 없었습니다. 카우아이의 해변을 산책하다 보면 야생 닭들이 많습니다.
“알고 있니, 치카? 이 닭들은 가축이었다가 가축에서 벗어났어. 유전자도 야생종에 더 가까워졌지. 생각해보면 아주 멋진 일이야.”
---「치카」중에서
처음을 생각할 때, 처음 이 계에 발을 들이던 때 저를 가로막고 밀어내던 힘이 분명 있었어요. 보이지 않지만 완고한 벽들과 여전히 종종 부딪히고요. 계와 계 사이의 구분은 단단하거나 단단하지 않게 존재하고, 소개되고 연결되고 만나면서 생성되는 것들, 닫혀 있다가 열리는 문들은 확실히 있어요. 모란과 게처럼 함께 존재하면서 따로인 것, 일치하는 듯 뉘앙스가 다른 것, 세트이지만 세트가 아닐 때도 있는 것. 계는 지도에 존재하고 웹에 존재하며 인맥의 허브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희미한 동시에 뚜렷하고 아무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윤」중에서
“어디가 특히 징그럽나요?”
수석 채집가는 웬만한 이질성에는 둔해진 듯,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조 채집가에게 물었다. 보조 채집가가 정확한 명칭을 찾아 서류를 훑었다.
“눈썹.”
“아, 눈썹.”
“말할 수 없이 징그럽네요. 대체 저 부분만 털이 남은 이유가 뭘까요? 얼굴 한가운데 저렇게 털이 두 줄로 남다니. 이상해. 말도 안 돼.”
“음, 그러고 보니 아주 기이해 보이네요. 실용적인 목적이었을 것 같지만요.”
“실용적이려면 털이 전체적으로 있어야죠. 으으, 맨살이 드러났다 다시 털이라니요.”
---「채집 기간」중에서
쿠키를 먹고 물을 마신 다음, 현정은 과감한 행동을 했다. 쓰러진 책꽂이 너머로 팔을 깊숙이 넣어 다른 책꽂이에서 떨어진 책들을 이쪽으로 끌어온 것이다. 기운 책꽂이가 아예 무너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손을 멀리 뻗었다. 바로 뒤쪽의 책꽂이는 청소년 소설이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현정은 기쁘게 로알드 달, 알키 지, 루이스 새커의 책을 찾아냈다. 로알드 달의 책은 《마틸다》였다.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책의 말미에 로알드 달이 자주 했던 말이 써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것 중 최고의 자질이다. 용기나, 관대함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더.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책은 친절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현정」중에서
원고지 5매에서 50매 사이의 짧은 소설은,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저는 좋아하는 쪽에 속합니다. 이렇게 모아보니 10여 년에 걸쳐 각기 다른 지면에 발표했지만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신기합니다. 이어지고 닮은 부분을 함께 발견해주셨으면 하고 묶었습니다. 긴 분량의 소설들보다 직설적인 면이 두드러져, 다정한 이야기들은 더 다정하고 신랄한 이야기들은 더 신랄합니다. 부드러운 진입로가 필요 없는 분량이어서 그렇겠지요. 그 완충 없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