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시리즈의 9편은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에 작은 초록색 점이 나타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우주공간을 표류하는 떠돌이 행성처럼 보이는데, 서서히 확대해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그러다 시청자들이 “아하, 행성이 아니라 사과였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부엌칼이 사과를 사정없이 두 조각으로 자르고, 그 후에는 조리사가 롤링핀으로 밀가루 반죽을 펴서 무언가를 만든 후 오븐에 넣는 장면이 이어진다.
얼마 후 배경은 참나무 장식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회장으로 바뀐다. 그곳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고, 그중 한 테이블의 끝에 붉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칼세이건이 앉아 있다. 웨이터가 세이건에게 갓 구운 사과파이를 권하자, 그는 카메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음과 같은 첫 대사를 날린다―“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사과파이를 만들려면 우선 우주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 p.022
연기의 정체가 궁금해진 나는 오랜 옛날부터 사용되어 온 화학분석법, 즉 “코 들이대고 냄새 맡기”를 시도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저명한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다양한 기체들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기체를 들이마시곤 했다. (…) 물론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다. 하루는 데이비가 실험 도중 일산화탄소를 지나치게 들이마시고 쓰러진 적이 있는데, 연구원들이 그를 바깥으로 끌고 나와 신성한 공기를 마시게 했더니 희미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괜찮네. 오늘 죽을 것 같진 않아.”
--- pp. 027~028
나는 숯덩이가 충분히 곱게 갈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슬라이드를 빼내려다가 화면 왼쪽 아래에서 훨씬 작은 검은 입자를 발견했다. 현미경 렌즈를 그쪽으로 맞추고 대충 크기를 가늠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입자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액체의 흐름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옛날 브라운이 왜 “살아 있는 분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유가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때 느꼈던 흥분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소싯적에 생전 처음 천체망원경으로 토성과 위성을 발견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내뱉었던 말은 지금 생각해도 참 바보 같다―“맙소사… 토성이 진짜로 있었네!” 그전에도 책이나 TV를 통해 토성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 p.064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면 물질의 불연속성은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입자는 사실 입자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양자장의 교란이었다. 모든 물체(사과파이, 인간, 별 등)는 이러한 진동이 모여서 탄생한 거시적 집합체이며, 이들이 함께 움직이면서 견고함과 영속성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전자장과 하나의 업쿼크장, 그리고 하나의 다운쿼크장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당신과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들은 동일한 우주의 바다에서 일어난 잔물결이기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하나인 셈이다.
--- pp. 284~285
ATLAS의 파비올라 자노티가 등장하여 CMS와 동일한 위치에서 “언덕”이 형성된 그래프를 보여주자, 청중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며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어느 정도였냐고? 월드컵 결승전에서 자국팀이 결승 골을 넣었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고 보면 된다.
그 자리에 모인 물리학자들은 함께 일궈낸 성공을 자축했고, 어느새 80대에 접어든 피터 힉스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CERN의 사무총장이 행사 종료를 선언할 때, 매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이제 좀 감이 오는군. 나는 아직 전문가가 아니지만, 대단한 놈을 발견한 건 사실이야.”
그렇다, 그들은 힉스입자를 발견했다.
--- p.324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가 탄생한 순간(중력, 시간, 공간, 양자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실망스러운가?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플랑크 규모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궁극의 이론을 논할 때가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암흑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빅뱅의 와중에 물질은 왜 반물질보다 많아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가? 힉스장이 기적과 같은 값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다행히도 과학은 미스터리가 많을수록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방금 열거한 미스터리가 앞으로 몇 년 안에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 p.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