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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10g | 140*216*20mm
ISBN13 979118881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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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내 기분은 외줄 위에 선 것처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출렁거린다. 월급이란 걸 받아본 지 5년이 되었다. 5년. 한때는 연금과 건강보험도 있었다. 아 끔찍해라, 이 일기가 예배당의 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불평을 늘어놓다가 눈물 콧물 흘리며 끝나는 곳. 정말이지 고아가 된 이 기분을 진정시키는 데 겨울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 p.28

내 한국어 실력은 유아기를 조금 벗어난 수준이다. 술집에서 맥주를 주문하고 재떨이를 부탁하는 수준의 아기. 아주 가끔 복잡한 길거리나 지하철 문 앞에서 두려움을 잊고 입을 연다. 어쩌다가 배운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뇌에 들러붙어 식당의 식탁이나 의자 아래에 붙은 껌처럼 비밀스러운 삶을 산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말이다. “죽을 시간 있어요?” --- p.29

진짜 코미디언이란 타인의 결점을 놀리거나 바보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을 만들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한다. 우리는 이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60

정당한 전쟁이란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전쟁이라는 행위는 두 당사자 간에 상실된 믿음과 사랑을 재건하기 위한 필요성으로부터 탄생한다고 했다. --- p.88

번역가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여 옮겨야 한다. 마치 집 한 채를 해체해서 모든 자재를 싣고 바다를 건너 다른 땅에다가 원래 집과 같은 새집을 짓는 것과 같다. --- p.89

가끔은 버스에서 내 옆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혹은 광고판에서 무슨 상품을 팔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순간의 평온한 기쁨에 휩싸이곤 한다. 서울은 명상을 위한 넓은 들판 같아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듣기 위해서 노력하고, 36년을 산 내가 이 땅 위에서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지 알아내기 위해서 고민한다. --- p.104~105

우리 스스로가 포기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싶고, 모든 정보를 알고 싶고, 모든 곳을 여행하고 싶고, 모든 것에 관해 말하고 싶고, 모든 것에 관해 쓰고 싶고, 모든 것을 만지고 싶고, 몸의 전부, 몸의 일부, 정신, 영혼, 죽은 것, 기계, 유령까지도 간음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흘러넘치는 욕망이 우리를 착취한다. --- p.106~107

개가 구역을 표시하듯이 한구석을 내 자리로 만드는 것, 중요하다. --- p.113

종말에 14시간 더 가까운 이곳, 14시간 미래인 한국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항상 사라졌다가 되돌아오는 삶을 꿈꾸었다. --- p.134

여기,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으로 가득 찬 이곳은 지금 오후 다섯 시다. 하루 중 가장 힘겨운 시간. --- p.135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 이 기분이 너무도 끔찍하다.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어떨 땐, 납으로 된 옷을 입은 것만큼 무겁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콜롬비아에 살았을 때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반대편 땅의 끝에 존재하는 것. 주름 속에 존재하는 것. 타인이 된 것 같은 기분 말이다. --- p.152

그 발코니에서 다비드는 내게 한국에서 지내는 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몇 초쯤 생각하는데 우리 집 뒤 목련 나무와 자정의 귀갓길, KBS 출근길 지하철, 노량진 수산시장, 어지러운 내 책상, 누워서 책을 읽곤 하는 내 소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이 단순한 것들로부터 느끼는 피로함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나는 행복해. 술 한 잔을 더 마시기 전에 다비드가 말했다. “에르마노, 나는 베네수엘라가 너무너무 그리워. 그런데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좋은 나라는 여기, 한국이야.” 며칠간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보다 더 좋은 설명은 없기 때문이다. --- p.172

‘골목’에 가서 위스키를 한잔할까 생각했다. 딱 한 잔이면 좋으련만, 보통 한 잔이 끝나면 두 잔, 그러다가 친구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몇 잔으로 늘어난다. ‘인제 어쩌지?’라는 질문이 귓속에서 울린다. ‘인제 어쩌지?’ 짙은 공허감 속으로 가라앉으며, 밤의 일부가 창문을 통해서 나를 지켜본다. 나를 보지 않고도 바라본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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