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힘들고 매우 귀찮게, 그리고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느끼게 만들어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 p.9
기사에 나의 책 《여행은 결국, 누군가의 하루》의 일부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명백히 내 글을 훔쳐 쓴 기사였다. 내가 쓴 대로 문단이 통째로 베껴 써져있었고, 내 경험과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경험과 감정인 것처럼 가져다 썼다. 더구나 내 경험과 감정에서 출발한 글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결론마저 내리고 있었다. 참담했다.
--- p.15
두 문단 이상이 ‘복사해서 붙여 넣기’ 수준으로 똑같은데 어떻게 ‘유사’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느냐, 더구나 이번 경우는 기사를 쓴 사람이 직접 표절을 인정했는데 사실을 확인할 게 어디 있냐며 표절 기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으니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 p.18
저는 잘못을 인정한 K씨에게 더 이상 피해가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지 말고, 언론사로서 역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 p.21
K의 고백 아닌 고백을 통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오마이뉴스가 이번 일에서 피해자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를 침몰시킨 선장이 혼란을 틈타 슬쩍 자신부터 구명보트에 올라타 승객인 척 연기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 p.22
“그래서 그 부분은 덜어냈잖아요.”
그녀는 강하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덜어내면 문제없다는 거예요?”
“우린 사과했고, 그럼 문제없다고 보는데.”
담당 편집기자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말했다.
--- p.27
오마이뉴스는 전부터 나를 알고 원한을 지니고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 일을 통해 나를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내가 어리고 힘없는 무명 작가라는 사실 뿐이었다.
--- p.30
더 이상 대답 없는 그들에게 소극침주(小隙沈舟, 조그만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라는 사자성어를 명심하길 바란다는 메일을 보내고서 나는 거리로 나섰다.
--- p.30
광화문역 5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도중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절반쯤 오르자 회색빛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하늘이 낯설었다. 조금 더 오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는데 그 바람 역시 낯설었다. 도시 소음이 들려왔다. 그 소음마저도 낯설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4
“위선의 오마이뉴스는 들어라.”
--- p.38
처음으로 내게 길이 아니라 무슨 일이냐며 물어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시위를 시작한 지 5시간 만이다.
--- p.42
광화문 5번 출구 앞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길 물어보는 순위는 시청, K문고, K안과 순이다. 그 자리에서 1인 시위를 계획 중인 독자가 있다면 세 곳의 장소가 어디 있는지 미리 꼭 확인하길 바란다.
--- p.50
처음 시위를 하겠다고 할 때 나를 말리던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나는 어두운 세상을 손전등 하나만을 가지고 밝히겠다고 나선 세상 모르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
--- p.65
더구나 내가 서 있을 땐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금발의 백인 여성이 피켓을 들고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으니 모든 사람이 아내를 쳐다봤다. 마치 그녀가 쇼윈도 안에 갇힌 채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아내에게 뛰어갔다.
--- p.69
오마이뉴스가 내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을 전해 듣고는 창작자에게 자신의 창작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길 바랐다. 그들이 훔쳐간 내 창작물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 p.76
처음에는 오마이뉴스가 제대로 사과하고 일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서 나를 응원했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마이뉴스의 강경한 태도에 적잖이 당황해하며 왜 오마이뉴스를 난처하게 만드냐며 나를 오히려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이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냐?, 네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된다, 그만 포기하고 넘어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늘어났다.
--- p.81
해가 지고 어느새 밤이 되었는데도 오마이뉴스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 p.82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잘못된 일에 대해 저항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일이야. 더구나 작가가 사회의 권력인 언론을 상대로 직접 나선 거잖아.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난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네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할 줄 알았어. 그래서 사람들한테 이 훌륭한 작가 친구가 바로 내 친구다, 정말 멋지지 않느냐, 자랑하려고 왔어. 그런데 어째서 이런 큰일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야? 언론이 작가의 책을 표절했고, 그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졌고, 그 사실을 덮으려고 하는데 이 얼마나 큰일이 아니야? 이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라고. 프랑스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야. 만약 이런 일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야.”
--- p.87
“이름이 뭐야? 응, 그래. 정태현이, 내 말을 이해 못하네. 내 말은 그런 작은 일에 목숨 걸지 말고 그 시간에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해서 시위하라는 거야. 오마이뉴스 까지 말고.”
--- p.92
“모래요짱. 우리 한국 떠나서 당신의 나라, 캐나다로 가서 살까?”
“왜? 갑자기.”
“나 지금 이 나라를 떠나면 앞으로 아무 미련 없이 다른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 p.101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나를 말리던 상사가 말한 게 이것이었을까. 상사는 내게 바깥세상은 무척 추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 의미가 단순히 돈 문제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상사가 회사를 나가게 되면 얻게 될 것이란 그 교훈을 지금에서야 얻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 바깥세상은 정말 추운 곳이었다.
--- p.142
“그럼, 피해자가 이렇게 거리에 나와 있는데도 찾아오지 않는 거라면 리더가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자네가 당당하게 그를 찾아가야지.”
--- p.146
“대표님, 이 일을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대응했습니까? 제가 한 달 넘게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나요?”
이번 질문만큼은 그가 모른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알아.”
O 대표는 순간 표정을 바꾸더니 반말로 대답했다.
---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