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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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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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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0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578g | 130*204*30mm
ISBN13 9791197157837
ISBN10 119715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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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드리운 녹색 커튼을 살짝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언덕 위로 하얏트호텔의 푸른 유리들이 햇살을 머금고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남산.
엄마의 젖무덤처럼 서울 한복판에 오뚝 솟은 남산. 밤새 내린 눈을 소복하게 받았다. 흰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하얀 소나무들은 천사의 날개처럼 고결한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었다.
--- p.14

어디선가 한줄기 선득한 바람이 쌩 불어와 거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거지는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아파트 벽을 따라 건들거리며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시커먼 어둠이 그를 가뭇없이 삼켰다. 그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 p.36

그 가을 저녁 자작나무 아래 피워놓은 모닥불 옆에서 우리는 서로 손을 잡기도 했고, 통기타 연주를 하는 라이브 카페에서는 내 어깨에 바짝 기대어 옹송그리고 있는 희재의 가늘가늘한 입술에 은근슬쩍 키스를 했다(애니골에 오길 잘했지 싶었다). 희재는 그때 눈을 감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지 않고.
--- p.54

프시케의 미모에 놀란 큐피드가 자기가 쏜 화살에 자기의 심장을 찔려 아름다운 프시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처럼, 나도 애지중지 간직해 온 한 개의 남은 황금화살을 날려 보내 내 심장에 정통으로 꽂았다. 바로 그 순간 사랑에 허기진 나는 새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내 영혼마저 말이다.
--- p.89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쩐지 이 세상일들은 전능자의 치밀한 섭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목적 없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 같아 화가 납니다. 죽음도 제멋대로이고요. 세상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어서 말해보세요.”
--- p.164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목에 건 줄을 풀고 문을 열어 나를 풀어주시오.”
“아, 그건 안 된단다. 나에게는 그럴 권한도 힘도 없거든.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들 인간사회에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깡짜를 놓치 못하도록 관습이나 전통이란 게 있거든.”
--- pp.240~241

동산의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흔들려 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어린 염소의 피가 양푼에 뚝뚝 떨어지며 내는 소리와 합쳐져 파동을 일으키면서 묘한 하모니를 이뤄냈다. 그것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도 낼 수 없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소리였다.
--- p.249

희재는 눈을 질끈 감고 두 팔을 벌리고 청량한 물줄기를 받았다. 물에 젖은 속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선명하게 드러난 젖꼭지가 옷을 밀어내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 p.323

어둠 속에서 강렬한 한줄기 섬광이 번뜩이는 것처럼 그 순간 희재의 마음속에 번쩍, 하는 빛이 지나갔다.
‘아, 이거다!’
희재는 헤드랜턴을 벽에 바짝 대고 벽면을 살펴봤다. 울퉁불퉁한 검은 벽면이 선명히 드러났다.
--- p.358

스승님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 빛나다 못해 이글이글 타는 불 같다고나 할까. 그의 눈빛은 적의 거대한 탱크 위에 올라타 탱크 문을 열고 수류탄을 던져 장렬히 산화하려는 군인의 눈빛과도 같았다. 나는 그런 스승의 모습에서 대체 인간과 영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경이로운 생각을 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어떤 섬찟한 불길함을 느꼈다.
--- pp.37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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