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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평전

: 광기에 맞선 이성

[ 양장, 개정판 ]
리뷰 총점10.0 리뷰 11건 | 판매지수 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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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12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82g | 138*210*22mm
ISBN13 9791190136860
ISBN10 1190136864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사명과 삶의 의미
시대상
어두운 청년 시절
초상
대가의 시절
인문주의의 위대성과 한계
위대한 경쟁자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기 위한 투쟁
위대한 논쟁
종말
에라스무스의 유산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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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것, 문학과 철학, 책과 예술 작품, 여러 언어와 민족을 사랑했다. 그리고 더욱 숭고한 과제인 교화를 위해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인류를 사랑했다. 그런 그가 이성에 반하는 정신이라며 증오한 단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광신이었다.
--- p.12

세계 분열의 끔찍한 순간에 개인의 의지는 무력해진다. 정신적인 사람은 관찰이라는 격리된 영역으로 자신을 구해 내고자 하지만 헛된 일이다. 시대는 그를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가라며 혼란 속으로 떠다밀고, 이 패거리 아니면 저 패거리에 들어가라 하며, 이러이러한 주장을 하라거나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강요한다.
--- p.21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딜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그리고 언제나, 다시 그 시대는 온다.
--- p.27

에라스무스는 시대의 빛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시대의 힘이었다. 그는 길을 밝혀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길을 걸어갈 줄 알았다. 그런 가운데 그 자신은 항상 빛의 근원처럼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자가 그 길을 최초로 걸어가는 자보다 덜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는 자들도 자신의 일을 한다.
--- p.85

새로운 것을 건설하려면 항상 존재하는 기존의 것을 먼저 흔들어야만 한다. 모든 정신의 혁명에서는 비판자와 계몽자가 창조자와 개조자에 앞선다. 흙이 부드럽게 부서진 이후에야 땅은 비로소 씨앗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법이다.
--- p.102

16세기 초, 에라스무스의 이름은 단순한 문학적 명성에서 벗어나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된다. 그가 대담했더라면, 그는 그 힘을 세계사를 뒤흔드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그의 세계가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어떤 일을 단지 해명해 줄 수 있을 뿐 형상화하지 못하며, 단지 준비해 줄 수 있을 뿐 수행하지 못한다. 종교개혁은 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것이며, 그가 뿌린 것을 다른 사람이 수확할 것이다.
--- p.110

인문주의는 제국주의와 다르며 적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하인을 원하지 않는다. 이 정선된 영역에 속하고 싶지 않은 자는 그냥 바깥에 있어도 좋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누구도 이 새로운 이상에 억지로 밀어 넣지 않으며, 몰이해에서 비롯된 모든 편협성은 세계 화합을 교훈으로 삼는 이곳에서는 낯선 것이다. 한편 이 새로운 정신의 조합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거부당하지 않는다. 교육과 문화에 대한 욕구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문주의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직위의 사람들, 남자든 여자든, 기사든 신부든, 왕이든 상인이든, 세속인이든 수도사든 누구나 이 자유로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어떤 인종인지, 무슨 계급인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국적은 어딘지 묻지 않는다.
--- p.120~121

전쟁이라는 개념은 결코 정당함과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재차 묻는다. 전쟁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에라스무스에게는 신학의 영역에도, 철학의 영역에도 절대적 진리나 유일하게 유효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진리는 언제나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권리 또한 마찬가지다.
--- p.125

“나는 다시 꽃피고 있는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중립의 자세를 지킬 것입니다. 나는 격한 간섭보다는 현명한 자제의 자세를 통해 더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p.168

그는 양편 중 어느 편에도, 교황 편에도 루터 편에도 서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어느 편의 지지자라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 평화일 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오직 온 인류를 보호하는 작업만을 원한다! “나는 나의 평온을 원한다. Consulo quieti meae.”
--- p.196

어느 곳에서도 파벌에 가담하지 않으려 했기에 어디에서도 편안치 못했던 이 중립의 남자를 위해 역사는 웅대한 상징을 만들어 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뢰벤이 너무도 가톨릭 쪽이었기에 그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고, 바젤은 신교도의 도시가 되어 나와야 했다. 어떤 독단에도 관계하려 하지 않고, 어떤 파를 위한 결정도 하지 않으려는 이 자유로운 정신,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이 정신은 지상 어디에서도 정착지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 p.239

인류애의 사상이, 인간을 더 사랑하고 더 정신적이 되어야 하며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류의 가장 숭고한 과제라는, 소박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그 사상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글로써 길을 놓아 준 것은 에라스무스의 명예로 남을 것이다. 비록 현세의 공간에서는 패배했을지라도.
--- p.269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에라스무스로 답하다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예리한 시선으로 에라스무스의 삶을 추적한다. 츠바이크는 혼인이 금지된 신부의 자식, 수도원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스물여섯에 신학교를 빠져나와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한 에라스무스의 생애에서 ‘자유’라는 고결한 가치를 발굴한다. 에라스무스는 실로 그 어느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려 하지 않았다. 편협한 광신은 그가 가장 멀리한 것이었고,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며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에라스무스 평전』은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한 1934년에 출간되었으며, 이듬해 츠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다. 망명을 앞두고 종교전쟁의 혼돈 속에서 모든 극단을 거부하며 화합을 도모하고 인류애의 가치를 내세운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삶을 거울삼아 폭력으로 얼룩진 광란의 시대를 고발하고 평화를 향한 자신의 신념을 밝힌 것이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을 거부하다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인 『우신 예찬』은 ‘우매함’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사치와 향락에 빠진 교회를 신랄히 풍자한 계몽주의의 효시로 꼽힌다. 동시에 이 책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의 의식 깊은 곳에 개혁을 향한 의지를 심어 주었다. 에라스무스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독자적인 성경 번역이었다. 그때까지 성경을 옮기는 일은 교황청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위였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 15년이나 앞선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성경 번역은 그리스도의 삶과 멀어지고 있는 교회를 비판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발굴’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한 것으로,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자연히 복음주의 신앙의 기틀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아흔다섯 항목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때려 박으며 종교개혁의 나팔이 울린다. 그러나 그 일을 예비한 것은 에라스무스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격분해 말하듯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아 주었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킨 것’이다.” 루터 스스로도 “누구든 자신의 생각이 에라스무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에게서 배우지 않은 자 누구이며, 그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라며 에라스무스가 자신을 지지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렇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가톨릭 비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편을 들지 않는다.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거친 격정과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 섞인 비난은 그가 가장 멀리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루터가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든 이후 로마에서는 그를 향한 파문장이 마련되고, 많은 개혁가가 종교재판에 넘겨지며, 곳곳에서 화형대의 불길이 치솟는다. 한편 민중의 거센 혁명 의지를 마주한 개혁가들은 타락한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당초 목적과 달리 맹목적인 광신에 사로잡혀 점차 격렬해진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그리고 유럽은 둘로 갈라진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그런 혼란과 분열에 빠져들기를 거부한다.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 평화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평화주의의 선구자인가,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인가?
심리 묘사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섬세한 필치로 써낸 에라스무스의 은밀한 내면


이제 시대는 끔찍한 증오로 묻는다. 교황이냐 루터냐, 가톨릭 편에 설 것인가 신교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교리인가 복음인가. 정신의 자유와 내면의 독립을 추구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겐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도, 루터와 신교의 맹목적인 혁명 의지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정신적인 것, 지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를 내세운 에라스무스는 양편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한다. 교황청에 루터를 파문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며 루터가 지적한 오류와 잘못을 논의할 종교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반대로 루터에게 화급하고 거칠게 나서지 말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비극이다. 정신의 인간 에라스무스는 갈등을 중재할 뿐 해소하지 못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루터를 불러들일 때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 머물렀다. 추방당한 루터가 복음을 앞세워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탈선을 비판하며 그에게 자문할 때에도 자신은 루터의 글을 정확히 읽지 않았다며 빠져나간다. 이와 동시에 교황이 종교전쟁에 내몰리는 독일 민중을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지만 역시 이런저런 말로 둘러댈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언제나 결정적인 언사를 피하고, 중립을 지킨다.

바로 여기에 평전의 대가 츠바이크의 진가가 드러난다. 츠바이크는 인물을 찬양하거나 그의 강점만을 드러내지 않고 위대함과 그 한계를 여과 없이 서술한다. 덕분에 역사 속 잠들어 있던 인물이 생동감을 얻고, 읽는 이는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에라스무스 평전』에서도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의 성과는 물론 미흡한 부분까지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양쪽에 모두 관계하고 있는 에라스무스 내면의 갈등, 평화와 화합을 향한 고뇌, 양편과 함께 허물어져 가는 그의 상황을 밀도 높게 그려 냈다. 이에 더해 겉으로 드러난 육체에서부터 가장 안쪽 신경에 이르기까지, 에라스무스와 완전히 다른 기질을 타고난 마르틴 루터를 등장시킨다. 판이한 두 캐릭터와 섬세한 심리 묘사, 역사를 바탕으로 한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독자를 단숨에 16세기로 인도한다.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시대에
에라스무스를 읽는다는 것


우리 사회에서는 심심치 않게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는 단테의 말이 유행하곤 한다.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양쪽 모두에 관계하며 설득하려 드는 에라스무스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를 예약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편 가르기가 극에 달한 시기,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고 몰아붙이는 시대,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세상에, 이성의 힘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은 에라스무스의 생애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반전주의자가 된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의 모습을 빌려 나치의 폭력에 항거하고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다. 20세기 인물 츠바이크가 16세기 인물 에라스무스에 관해 쓴 것이지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보여 준 삶의 자세는 시공을 초월해 대립과 반목, 갈등과 혐오로 얼룩진 지금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1997년 자작나무, 2006년 아롬미디어에서 나온 책을 다시 출간하며 시대에 맞추어 문장을 새롭게 다듬고 오역 수정과 함께 여러 보완 작업을 거쳤다.

회원리뷰 (11건) 리뷰 총점10.0

혜택 및 유의사항?
[에라스무스 평전] 평화주의적 인류애 옹호자, 에라스무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골드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s*****a | 2022.12.29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국가를 실리적으로 경영하라, 철저한 전문 외교관 마키아벨리 vs 평화주의적 인류애 중시자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가 인류애를 후대 사람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악명 높은 [군주론]이 출간된다.   모든 군주와 국가의 권력 의지, 힘의 의지를 최상위 목표로 승격시킨 마키아벨리, 그에게 정치는 도덕과 관계 없는, 철저히 독자적인 학문이다. 이에 반해;
리뷰제목

국가를 실리적으로 경영하라, 철저한 전문 외교관 마키아벨리 vs 평화주의적 인류애 중시자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가 인류애를 후대 사람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악명 높은 [군주론]이 출간된다.

 

모든 군주와 국가의 권력 의지, 힘의 의지를 최상위 목표로 승격시킨 마키아벨리, 그에게 정치는 도덕과 관계 없는, 철저히 독자적인 학문이다.
이에 반해 에라스무스에게 정치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를 잇는 윤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군주와 국가 지도자는 신의 종이어야 하고 도덕 이념의 대표자여야 한다.

 

힘의 원칙을 찬미하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이후 유럽 모든 민족의 열정적인 '대립'을 이끌어 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마키아벨리식 군주와 국가 지도자는 인류와 인류애 사상에 몰입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감상을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의 약점과 심리적 긴장을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무엇인가?
인간을 더 사랑하고 더 정신적이 되어야 하며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인류의 가장 숭고한 과제이다.
모든 종교와 신화가 갖고 있는 '인류의 교화'라는 원초적 꿈, 공정한 이성이 승리하는 희망에 가득한 꿈,
이런 꿈을 꾸는자, 그가 에라스무스라고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말한다.

 

중세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렵기 이전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위적이고 부패에 빠진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우신 예찬] 썼다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의 얕은 지식으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는, 진공의 공간에서 태어나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 이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필명이다.
출생 연도 1446년도 확실한 것이 아니며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생아이다.
네델란드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프랑스와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다.
신앙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서관이 있다는 이유로 수도권에 들어가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사제로 기억되기 바라지 않은 것 같다. 교황으로부터 신부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특별 면제를 받아냈고
수도원을 나온 뒤에는 상관의 간청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느 것에도, 누구에게도 구속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본성의 강요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자 했고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려고 했다.
궁정에도 대학에도 수도원에도 의무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 정신의 자유를 지켰다.

 

사제가 되었으나 교황과 수도원에 아무 의무감을 느끼지 않고 불타는 신앙심도 없었다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갈등을 혐오하고, 권력과 권력자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을 기피했다. 그들과 타협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독립이 중요했다.
수도원의 침실은 건강에 해롭고 삭막하게 회칠한 벽은 얼음처럼 차서 거의 변소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달걀과 고기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포도주는 시어 빠졌다.
에라스무스, 그는 청년 시절을 수도원에 수감되어 보낸 '죄수'였다. 그는 호시탐탐 '탈출'을 꿈꿨고 성공했다.

 

중세 최고의 지성 에라스무스와 그의 사상을 한번에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터와의 첨예한 대립보다 인간 에라스무스의 인생을 먼저 알고 싶었다.
수도원에서 나와 자유로운 여행자로 또 최고의 학자로 살았지만 가난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철저한 신분주의 시대에 가난한 학자가 후원자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때로는 아첨하고 때로는 비굴해야 했다.

 

뛰어난 전기 작가로 알려진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를 통해 자신을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가 자신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자 그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망명 직전 펴낸 책이 바로 [에라스무스 평전]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애를 그 무엇보다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에라스무스를 통해 혼돈과 광란의 시대를 고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먼저 세상에 이별을 고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에라스무스는 인류를 사랑한 평화주의적 인문학자이면서 동시에 용기 있게 시대에 맞서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이중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것 같다. 루터와 모든 면에서 비교되는 에라스무스.
비단 학문적 성과와 정신적인 면뿐 아니라 신체적인 조건에서도 루터와 그는 상반된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가 평생 잃지 않았던 삶의 자세, 곧 중립의 자세를 유지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정신과 이념에서는 승리했으나 현실에서는 패배자로 남은 에라스무스.
그는 이상에 빠진 나약한 관념주의자인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적 사상에 더 가까운 나는 어느 한 편에 결코 붙지 않는 중립적인 에라스무스의 자세와
1차,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저자의 태도가 매우 안타깝다.

 


저자는 에라스무스를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이라고 불렀다. 이 책을 번역한 정민영 교수의 말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우리의 주변은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극한 대립과 분열, 갈등에 싸여 있다. 일방적인 자기주장과 증오만 난무할 뿐인 우리 사회의
모습은 천박함 그 자체로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시선으로 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광신의 격류'를 견뎌 내야 하는 시대다. 올바른 판단과
존중의 정신, 인내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274~275쪽)

 

해당 도서는 원더박스 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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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에라스무스 평전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z******0 | 2022.12.08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을 책들이 너무 많고, 연계되어서 읽고 싶은 책들도 줄을 짓게 된다. 이 책 역시 세계고전문학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이 생기면서 호기심이 갖게 된 책이다. 많은 고전작품 속에는 종교에 대한 믿음이 광기로 변하는 과정 속 인물들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모습을 마주하면서 왜 이럴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갖기;
리뷰제목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을 책들이 너무 많고, 연계되어서 읽고 싶은 책들도 줄을 짓게 된다. 이 책 역시 세계고전문학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이 생기면서 호기심이 갖게 된 책이다. 많은 고전작품 속에는 종교에 대한 믿음이 광기로 변하는 과정 속 인물들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모습을 마주하면서 왜 이럴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갖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극단으로 나뉘어진 사회와 공동체의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에라스무스인가. <에라스무스 평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통해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종교개혁의 시작에는 루터가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 나는 저자가 에라스무스의 전기를 쓰고자 한 이유가 궁금했다. (읽기 전에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는지, 책의 초반부터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선택했던 방식과 태도, 그가 살아낸 그의 삶 자체가 그것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다.

 

저자는 에라스무스의 삶을 책에 옮겨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이 첫 출간된 1934년은 히틀러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시기였고, 그 시기에 저자에게 "나치라는 독선적 광신자들의 움직임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의 모습을 빌려 자신의 사상적 입장과 신념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는 역자의 말이 책 속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을 불러온 르네상스 시대에 세계주의자이자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로 손꼽힌 인물이다. 『우신예찬』을 통해 성직자와 교회의 타락을 풍자했고, 초기 크리스트교의 단순성과 소박성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인문주의자이다.

에라스무스의 생에서는 '진정한 자유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유는 개인의 자유에 머무르지 않고, 빛을 발하여 온 세상에 퍼졌다. 그가 원했던 것은 "화합"과 "평화"였고,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니체, 볼테르 하이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을 계속 묶어 놓을 만한 모든 것을 거부"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이 자유로웠을까.

에라스무스의 삶에는 "중립의 태도"가 빠질 수 없고, 그것이 그의 한계라고도 말하는 츠바이크, 그것이 "평화주의의 선구자인지,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인지 생각해볼 지점이다.

츠바이크는 에라무스의 업적과 함께 그의 한계까지도 모두 서술해놓았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했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어떤 지점과도 맞물린다. 우리는 늘 그런 중립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중립을 지키는 침묵이 떠오른다.

평소에 작가의 작품이 우선인 나는 평전을 즐겨 읽지 않는다.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은건 너무 잘한 것 같지만??

르네상스 시대, 종교개혁에 인물의 전기를 통해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적 배경 뿐 아니라 대조적인 인물, 루터를 등장시켜서 그들의 심리와 사상 묘사, 이어 군주론까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츠바이크의 다른 평전과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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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예리한 시선으로 추적하는 에라스무스적인 삶의 고찰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m******9 | 2022.11.25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1934년 히틀러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던 때 폭력을 부정하고평화와 자유를 갈구하던 휴머니스트 츠바이크는, 자신의 작품이 금서로 묶이는뼈아픈 체험을 하게 된다. 츠바이크는 망명을 떠나기 전 그 혼돈의 시대에 에라스무스의모습을 빌려 자신의 사상적 입장과 신념을 밝힘으로써 혼돈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작가츠바이크 자신의 내면적 자화상을 그려내고, 정신적 상흔을 이 책에 기;
리뷰제목
1934년 히틀러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던 때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던 휴머니스트 츠바이크는, 자신의 작품이 금서로 묶이는
뼈아픈 체험을 하게 된다. 츠바이크는 망명을 떠나기 전 그 혼돈의 시대에 에라스무스의
모습을 빌려 자신의 사상적 입장과 신념을 밝힘으로써 혼돈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작가
츠바이크 자신의 내면적 자화상을 그려내고, 정신적 상흔을 이 책에 기록한다.

에라스무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것, 문학과 철학, 책과 예술 작품, 여러 언어와 민족을
사랑했다.(라틴어를 새로운 예술 형식과 이해의 언어로 상승시킨 것은 잊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욱 숭고한 과제인 교화를 위해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인류를 사랑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국가, 세계관 등 어느 영역에서든 타협을 원칙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모든 유형의 광신과 투쟁했다. 에라스무스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어떠한 종교적, 정치적 신봉도 강요받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저항했다.
그는 일평생 불꽃처럼 타오르는 폭발적인 지식의 힘을 이용해 자신만의 망상에
빠진 독선적 광신자들과 싸웠다.

그는 수많은 형태의 '어리석음' 중 하나로 여긴 편협한 광신의 변종과 변형된 모습을
자신의 저작 '우신예찬 Moriae encomium' 에서 재미있게 분류하고 희화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사명과 삶의 의미는 대랍하는 것들을 인간애의 정신속에서 조화롭게 통합하는 데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조화롭게 연결하고 갈등을 대화로 푸는 천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함으로써 비범한 술책과 갈등을 약화하고, 희미한 것을 밝게 해 주고
혼란을 수습하고, 찢긴 것은 새로 엮어 주며, 고립된 것에는 지고한 공통의 관련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인 인내가 가진 본래의 힘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다시 21세기의 혼돈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현재의 국내 상황만 보더라도 우리의 주변은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극한 대립과 분열, 갈등에
싸여있다. 일방적인 자기 주장과 증오만 난무할 뿐인 우리 사회의 모습은 천박함 그 자체로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시선으로 보자면 여전히 우리의 시대는 '광신의 격류'를 견뎌내야 하는 시대다.
시대는 우리를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가라며 혼란 속으로 떠다밀고, 이 패거리 아니면 저 패거리에
들어가라 하며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강요한다. 어느 누구도 집단적 망상과 편협한 사고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중심 잡힌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츠바이크는 16세기의 이야기를 현재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먼 과거의 역사가 새롭게 되살아나 우리의 현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예리한 시선으로 에라스무스의 삶을 추적해 나가면서 에라스무스의
중립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다. 균형을 잃지 않는 츠바이크의 판단력과 관찰력은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의 위대함과 단점을 공정하게 서술하고 비판한다.
정신과 이념에서는 승리했으나 현실에서는 패배자로 남은 에라스무스의 비극은,
행동을 위한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조화, 인류에 대한 믿음으로
시대의 정신을 이끌었던 인문주의가 교육받지 못한 하층 민중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오류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의 비교를 통하여 아직도 그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영원한 것은 조용히 인내하는 것이다.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딜 줄 안다.
이성의 시대는 다시 온다.'

시대와 공간의 차원을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체적인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 <에라스무스 평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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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2건) 한줄평 총점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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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책을 드디어 읽게 되어 기쁨에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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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 | 2023.01.23
평점5점
인문주의자이자 에라스무스에 투영시킨 츠바이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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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e*a | 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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