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상작인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는 1990년대에 함께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을 졸업한 네 사람이 이후 삶의 현장에서 ‘고졸 출신 여성 청년’으로서 살아야만 했던 삶을 따라간다. 원한다고 믿은 삶 쪽으로 가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한 친구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곧 노력이라 믿으며 살다가 제가 꿈꿔왔던 미래가 아니라 외로운 죽음에 제일 먼저 도착하고, 나머지 셋은 지금 마음껏 분노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한 채 친구를 무릎 꿇린 그 현실에 여전히 던져져 있는데, 그 순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무도 죽지 마”라는 대사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다급한 개입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디테일, 적절한 상징, 공감어린 시선, 깊은 여운이 어우러진 이 소설은 우리가 편혜영이라는 작가에게 경탄하게 될 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알려준다. ‘시험능력주의’와 ‘학벌신분사회’라는 말로 요약되는 우리 시대를 향한 작가의 회고적 응답이라고 할 만한 이 소설에, 동시대 청년들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김승옥의 이름을 딴 소설상이 주어지는 것은 몹시 합당한 일로 보인다._‘심사 경위 및 심사평’에서★김연수의 「진주의 결말」은 “이야기의 위력과 무력을 삼십 년 동안 고민한 어느 작가의 답변”(신형철)으로,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떠안은 ‘악녀’ 유진주의 마음을 분석하던 범죄심리학자가 분석이 결코 가닿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에 이르는 소설이다. 인간다움을 결여한 관습화된 접근이 아닌, 인간의 진심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만이 끝내 성취할 이해의 지평이 비로소 드러난다. 김애란의 「홈 파티」는 걱정과 동정이라는 가면을 쓴 채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을 탐욕스럽게 관음하는 상층계급의 기만을 폭로한다. 독일문학사상 최초로 하층계급이 주인공이 되었던 『보이체크』처럼 「홈 파티」는 청년의 좌절과 심화된 양극화로 얼룩진 2020년대 한국에서 밀려난 이들이 다시 주인공으로 올라서는 통쾌한 반격을 그려낸다. 정한아의 「일시적인 일탈」은 방황하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여성서사의 구조에 환상성을 가미해 놀라운 비약을 이끌어낸다. 소설의 결말에서 자신의 길로 향하는 이의 뒷모습은 영도(零度)로부터 시작되는 일상의 해방을 아침 햇살처럼 찬란히 비춘다. 문지혁의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선 어릴 적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가까스로 벗어났던 화자가 자신과 한국 사회에 그 사고가 남긴 흔적을 소설과 논문으로 쓰려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난관에 봉착한다. 다만 이 “삶의 곳곳에 있는 균열에 관한 이야기”(정영문)를 통해, 엄습하는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와 공감에 대한 노력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때 소설은 사람에게 진정한 승화의 길을 가리켜 보인다는 것이 밝혀진다.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은 딸 가족의 앵무새를 맡게 된 한 노년 여성의 이야기로, “우리 시대의 표정”(강영숙)이 될 만한 소설이다. 낯선 존재와 살아가며 겪는 불편의 감수가 어느새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이자, 기꺼운 교류, 서로가 서로를 ‘전부’라 여기는 분명한 사랑으로까지 발전할 때 어떤 독자라도 자신에게 고유하게 소중했던 존재를 떠올리며 코가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편혜영, 「포도밭 묘지」 다만 확실한 것은 “빼어난 권투선수”와 ‘새’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비석처럼 꽂힌” 파이프 지지대에 의지하여 자라다 말고 말라 죽은 피동적 ‘식물’ 이미지로 마감되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뒤,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솟구쳐오르는 반항과 항의의 충동이 소설 도입부에서 타이슨이 “처음으로” 날리는 “주먹”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불행을 향해 내지르는 연민어린 한 방의 발길질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_김화영(불문학자 · 문학평론가)“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김연수, 「진주의 결말」 과연 유진주는 아버지를 죽인 악녀인가? (…) 저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저 질문에 대한 답보다 더 중요한 답을 이끌어낼 다른 질문, 그런 것을 누군가는 찾아 물어야 한다. 성급하게 창궐하는 세상의 이야기들 속에서, 소설은, 유진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이야기의 위력과 무력을 삼십 년 동안 고민한 어느 작가의 답변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김애란, 「홈 파티」 홈 파티라는 새로운 연극 무대에서 오대표에 의해 자신의 불쾌와 도발까지도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정확히 목도한 순간, 마침내 이연은 마리가 아니라 보이체크가 되길 선택한다. “몸이 차가우면 더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 마리를 죽인 원작의 보이체크와 달리, 이연은 “정신이 맑고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정확하게 자신의 진짜 적인 오대표를 찌르는 데 성공한다. 사랑에 빠진 달뜬 목소리로 . 그렇게 소설은 21세기 신 新 보이체크를 탄생시켰다. _강지희(문학평론가)“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나약한 이들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이 소설로 말하자면, 여백은 ‘나’가 쓸 수 없는 K , 그리고 K가 쓰지 못한 ‘나’의 이야기 사이에 있을 것이다. 혹은 공포의 기원, 쏟아지는 빗속의 천변에 나타났다 사라진 개구리의 알 수 없는 이물스러움에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무지 앞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일시적인 일탈’이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라면 이 이야기는 참으로 정직하고 강렬하다. _정홍수(문학평론가)“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의 이야기였다. 자신을 향한 증오와 악의를 가늠하지 못한 채 잠든 여자,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여자. 그 유령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유령이라고 할 수 있나.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토록 깊은 피로와 원한에 사로잡힌 존재들을.”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소설의 형식은 쓰는 사람이 만들면 되는 것이고, 소설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매체이자 그것을 통해 쓰는 사람 역시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적 구성을 포함해 사람들이 소설에 있어야 한다거나 소설은 어떤 식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들은 무엇에 의해서도 정해진 것이 아니며, 사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고, 그 자체로 억지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충실히 따라 쓴 소설들을 읽을 때면 어떤 공산품들처럼 규격품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은 그런 틀에서 자유로웠고 그 점이 돋보였다. _정영문(소설가)“소설이란 그런 것일까? 몸을 던지는 장면을 보여주되 실제로는 몸을 던지지 않는? 자살suicide이 아닌 스스로의 사형을 집행self-murder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오직 ‘다리 위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그러다 엉뚱한 곳으로 뛰어내려 끝내 검은 물속으로 사라지고 마는?”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백수린의 소설은 우리 시대의 표정이 되기에 충분하고 「아주 환한 날들」은 그 대표작이 될 듯하다. (…) 그러니까 사랑과 이해는 평생에 걸쳐 모든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이고, 사랑만이 인간의 존엄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냥 느끼는 것이라고도 . 옥미와 앵무새가 그랬던 것처럼. _강영숙(소설가)“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알립니다우수상 수상작 가운데 구병모 작가의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작가의 뜻을 존중하여 작품집에 수록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