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닮은 얼굴, 우리를 닮은 목소리
『피프티 피플』에 담긴 우리를 닮은 얼굴, 우리를 닮은 목소리에는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이 녹아들어 있다. 작가는 그 안에서 허황한 낙관도, 참담한 절망도 하지 않는 건강한 균형감각으로 하루하루 겪어내는 삶의 슬픔과 감동을 조화롭게 버무린다.
소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의 사연, 성소수자의 시선, 층간소음 문제, 낙태와 피임에 대한 인식, 싱크홀 추락사고, 대형 화물차 사고 위험 등 한국사회의 현실문제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를 통해 그려지는 사연들, 예컨대 “빗길에 미끄러진 25톤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지만 화물연대의 집회를 보고 자신이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건네게 되는 아내의 마음에서 먹먹한 여운이 남는다.
그런가 하면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큼 『피프티 피플』에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꼼꼼한 취재와 자문을 통해 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보안요원, MRI 기사, 이송기사, 인포메이션 담당자, 홍보부 직원, 해부학 기사, 임상시험 책임자, 닥터 헬기 기사, 공중보건의, 제약회사 영업사원, 병원 설립자 등의 사연까지 담아냈다. 여기에 응급실, 정신과, 외과 등으로 찾아드는 환자들의 사연까지 더해져 이야기는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해진다.
의사와 환자로, 환자의 가족으로, 가족의 친구로 50명의 인물들이 이루고 있는 구도가 긴밀하고 짜임새 있기도 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치는 순간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는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미 위안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우리는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고 눈물도 흘리겠지만, 그 사람들 속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진창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잘 건널 수 있게 손을 잡아준다면 느리지만 굳건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것은 곧 사람에 대한 희망이자, 다음 세대에 대한 약속이다.
새로 쓴 작가의 말
『피프티 피플』을 쓰기 전해에, 제가 살던 곳에서 몇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싱크홀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연이어 일어난 다른 싱크홀 사고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후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불안감과 우려를 느끼곤 했습니다. 지역공동체의 사고 피해자에 대한 애도가 이 소설의 시작점이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6년이 훌쩍 지났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왔지만 가끔 싱크홀이 더 생기지는 않았나 찾아볼 때가 있고,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안도하게 됩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만약 2021년에 이 소설을 썼다면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형태로 존재하고, 흐르는 길이 완만히 방향을 틀며 변화해간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저 한 사람 안에서 이토록 물길이 바뀐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여 어떤 지형 변동을 일으키게 될까요? 언제나 오지 않은 날 쪽으로 고개가 기웁니다.
어디에 계시거나 마땅히 누려야 할 안전 속에 계시길 바랍니다. 단단한 곳에 함께 서서야 그다음이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처럼 믿고 있습니다.
2021년 여름
정세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