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사회의 후진성을 설명하면서 유럽 학자들이 들먹이던 ‘무문자 사회’라는 인식도 문명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 여겨진다. 서양 문화 우월주의 또는 중화사상, 농경-정주 중심 사고 틀이 만들어낸 일방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최근 역사 연구자들은 ‘기록의 역사’ 못지않게 ‘기억의 역사’를 중시하게 되었다. 기록의 역사란 오히려 문자를 아는 지식인 계층과 권력을 독점한 엘리트층의 생각과 관점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백 수천 년간 기억과 공감으로 전해지며 축적된 전승이야말로 전체 사회 구성원의 하부 구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자료라는 주장이 만만찮은 지지를 얻고 있다. 사실상 중국과 같은 몇몇 문화권을 제외하고는 10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중국의 제지 기술이 널리 전파되어 종이가 보급되면서 인류가 ‘기억의 시대’에서 ‘기록의 시대’로 대변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오랜 기억이 축적된 아프리카의 역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1장 가장 오래고 가장 젊은 대륙, 아프리카」중에서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에서 출발했고, 크레타 문명은 이집트 문명을 한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으로 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성취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꽃피운 종합 해양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흘러들어 미케네 문명을 잉태하고, 끊임없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 서기전 6세기 드디어 화려한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로마가 탄생했다. 건축과 예술, 신화적 구조를 띤 종교관, 과학과 철학 등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오리엔트 문명에 지적 신세를 지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음에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실체는 오랫동안 그 문명의 후예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관심을 유발하지도 못했다. 서양의 인물로 동양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 행위에는 문명의 위대한 전도사란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그의 죽음으로 사라져버린 마케도니아에 비해 문명의 깊이나 역사성이 훨씬 심대하고 광범위했던 페르시아제국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었다.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가 되는데, 동양이 공격하면 찬탈이나 파괴가 되곤 했던 우리 세계사 교과서의 표현과 관점도 왜곡된 역사의식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2장 인류 문명의 시험장, 서아시아」중에서
실크로드를 통한 물자의 이동은 문화와 사람의 이동을 수반하고, 그래서 물자의 중개를 담당한 오아시스 주민은 항상 동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인에 앞서 서방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서방 사람들에 앞서 중국의 제지 기술을 습득했다. 선진문화 수용은 새로운 문화 창조로 이어졌고, 특히 중개무역을 통하여 축적된 경제력은 새 문화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간다라 불교미술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간다라 양식은 인도 불교와 그리스 예술이 만나 이뤄진 것으로, 파미르고원을 거쳐 동아시아 각지에 전해졌다. 오아시스 주민은 또한 동서 세계에서 흡수한 이질 문화와 자신들이 창조한 혼합 문화를 주위 세계로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사마르칸트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한 소그드인들도 이런 부류 사람들이다. 이들은 4~5세기경부터 유라시아 육상 교통로를 이용하여 각지에 거류지를 만들고 동서 무역을 독점했다. 어려서 글을 깨치면서 장사를 배웠다는 소그드인들은 당나라에서 ‘호상胡商’이라 불리면서 진귀한 외국 상품을 팔고,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소그드인들은 몽골, 중국,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이익이 남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는데, 이 과정에서 문화 중개자로서도 역할을 했다. 예컨대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위구르 문자는 소그드 문자를 기본으로 한 것이고, 13세기 몽골인들은 위구르 문자를 차용하여 자신의 문자로 사용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서아시아에서 기원한 종교 역시 이들을 통해 초원에 전해졌다.
---「3장 동서 세계의 중심, 중앙아시아」중에서
광대한 인도 영토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생산되었다. 덕분에 부유한 인도는 고대부터 외국인이 선망하는 나라였다. 인도가 서북 지방을 통과한 투르크, 아프간 등 다양한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어 오랫동안 지배를 받는 아픔을 겪은 건, 모든 걸 다 가진 데 따른 역설적인 결과였다. 일부 이슬람 술탄은 인도에 정권을 세우지 않고, 엄청난 재물을 약탈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뒤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덕분에 인도는 수없이 파괴되고 폐허가 되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 겪었다. 근대에는 인도의 특산물을 수입해서 유럽에 팔려는 유럽 상인들이 줄지어 인도를 찾았고, 그들 중 한 나라인 영국이 인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도가 외국에서 온 세력에게 지배를 당한 것은 이슬람 지배 600여 년, 영국 지배 200여 년 등 약 8세기에 달했다. 그사이에도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전쟁이 이어졌고, 물리적 패배는 거의 다 인도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인도는 폐허 속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났고, 다시 먼지가 되었다가 부흥하는 역사를 이었다. 항상 패배했으나 결국은 살아남은 인도의 역사는 폐허 속에서 생존한 이전의 역사를 이어가며 지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도 역사는 자연환경이 준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장대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4장 공존과 병존의 역사, 인도」중에서
서양인들의 식민주의는 동남아시아 세계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사회적으로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식민지배를 통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또한 식민지에 소개된 서구의 의회민주주의 정치사상은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절대군주 체제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으며, 식민지에 도입된 서구식 행정체제는 정치제도의 혁신을 가져왔다. 식민주의는 산업화를 일으킨 서양 국가들이 자원 공급지 및 상품 수요지로서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했다.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서구 자본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현지 사회에 적용해 최대 이익을 추구했다. 전통적으로 농경 사회인 동남아시아에서 서구 자본은 무엇보다 농업에 집중했다. 그 결과 벼농사가 상업화하고, 플랜테이션이 도입되어 상업작물들이 대규모로 생산되었다. 서구 자본은 그 밖에 조선업과 광산업 등에도 투자했으며, 항만과 철도 및 도로가 건설되어 주요 항구들과 도시들이 농업·광업·공업 지역과 연결되었다. 식민주의 시대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외형적인 번영과 내부적인 빈곤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낳았다. 식민체제에서 한편으로는 수출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생산이 증대했으며, 특히 현지인 지주·식민 관리·상인·고리대금업자 등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농촌의 부채와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농민들의 불만이 증대했다.
---「5장 대륙과 바다의 징검다리, 동남아시아」중에서
마야인들이 0의 개념을 알았다는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마야인들은 전기 고전기인 서기전 1세기에 0이라는 숫자를 창안했다. 그 밖에 세계 문명사에서 0 개념이 있는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문명 말고는 없었다.마야인들은 수천만 이상인 수와 장구한 시간도 선과 막대기 단 몇 줄로 간단하게 표시할 수 있었다. 분수 개념은 몰랐지만, 점과 막대기라는 기호를 가지고 천문학적 계산도 정확하게 해낼 수 있었다. 마야인들은 유럽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태양년의 주기를 측정했다. 마야의 달력에 따르면 1년(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2일인데, 현대의 계산으로 1년은 365.242198일이다. 마찬가지로 마야의 달력에서 한 달(달의 지구 공전 주기)은 29.5308일인데, 현대에 측정한 삭망월의 주기(보름달이 된 때부터 다음 보름달이 될 때까지, 또는 초승달이 된 때부터 다음 초승달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가 29.53059일인 것을 보면 그들의 계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마야인들은 태양과 달의 주기를 정확히 계산한 데 따라 일식과 월식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6장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단일 문화권, 라틴아메리카」중에서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사건의 세계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신대륙과 구대륙이 연결되면서 경제의 규모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둘째, 신대륙에서 채취한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근대적인 산업 발전과 자본주의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셋째, 지리상의 발견으로 새 대륙에 식민제국이 형성되었다. 넷째, 서로 다른 인종들이 만남으로써 서로에게 다른 세계가 열렸고, 그로부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상업의 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졌다.
---「6장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단일 문화권, 라틴아메리카」중에서
옥수수, 콩, 아보카도, 바닐라, 카카오(초콜릿), 토마토, 호박, 열대 과일인 파파야, 과야바(구아버), 노빨(선인장 잎), 그리고 담배 등 아메리카의 수많은 농작물이 전 세계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를 크게 바꿔놓았다. 이들 작물 가운데 한국인과 뗄 수 없는 채소인 고추도 있다. 아시아 문명이 쌀을, 유럽인이 밀을 주식으로 했다면 옥수수는 멕시코 원주민의 주식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작물보다도 전 세계 음식 문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감자다. 감자는 잉카족의 터전이었던 페루가 원산지로서, 안데스 지역에는 갖가지 모양에 크기와 색깔도 다양한 수백 가지 감자가 존재한다. 감자를 처음 본 유럽 사람들은 이 식물이 마치 동물의 고환처럼 생겼다고 해서 혐오스럽게 여겼다. 러시아정교회의 한 사제는 감자가 성서에 나오지 않는 작물이므로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론했다. 그러나 훗날 감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류를 굶주림에서 해방한 구황 작물이 되었다. 토마토는 멕시코가 원산지인데, 아스떼까 언어로 ‘히또마떼jitomate’라고 하는 이 식물은 이탈리아로 가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사과(이탈리아어로 pomo d’oro)에 비유되어 ‘포모도로pomodoro’라는 이름을 얻었다.
---「6장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단일 문화권, 라틴아메리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