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외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밖에 없는 집에서 뒹굴며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노란 불빛에 희미하게 비추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스르르 풀어져서, 마치 나를 가둔 틀이 천천히 열리고 내 속을 하나하나 꺼내 서늘한 밤공기 속에 펼쳐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면에 쌓여있던 불필요한 열기와 습기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안정이나 힐링과는 조금 결이 다른, 스스로 정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심각하게 먼지투성이인 방인데, 이 싱그럽고 편안한 느낌은 뭘까. 분명 처음 묵는 장소인데, 집보다 더 집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행복에 파묻혀 잠들었다.
--- p.22
문을 열자 빨간 카디건을 입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귀엽고 동글동글 커다란 눈. 코 위에 계핏가루를 뿌린 듯 잘은 주근깨. 그리고 짙은 밤색의 몽실몽실한 머리카락. 마치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귀엽잖아? 상대가 꼬마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귀여움에 온몸에 긴장감이 돌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중략)
“어어, 그…… 넌 누구니?”
지금 상태에서 이 질문이 최선이었다. 그러자 아이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이름을 안 말했네요. 저는 이에하라 리리나라고 해요. 할머니가 여기서 지내라고 해서 이사 왔어요.”
“할머니라고?”
--- pp.30~32
‘뭐지, 이 느낌.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드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나. 하지만 리리나가 똑같은 말을 하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리리나에게 물었다.
“그렇구나. 나랑 같이 있는 건 편해?”
“응.”
“긴장된다거나 막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구나?”
“응.”
“리리나가 리리나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다면 뭐, 다행이고.”
“그 자체로 있다는 건 뭐, 그런 건가? 사츠타가 리리나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고, 생각대로 안 된다고 화내지도 않고, 리리나다운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 pp.66~67
지금까지의 나는 ‘상실’을 두려워했다. 누군가와 깊이 연을 맺고, 그 누군가의 행복을 항상 비는 관계가 되는 게 두려웠다. 귀찮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만 하고,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느낌. 그런 감정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겠지. 하지만 죽도록 노력해서 이런저런 일을 극복해 누군가와 맺어진다 해도, 영원하지 않다. 반드시 무슨 일인가가 벌어져 그 관계는 소멸한다. 서로가 싫어져 좋았던 관계가 사라지기만 해도 무척이나 괴로울 터인데, 행복의 절정에서 그 누군가를 통째로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상실. 진정한 의미의 상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만들어진 내 모습도 뿌리째 잃게 된다. 상대의 존재와 함께 내 모습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리리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어둠의 틈새로 추락해 떨어지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p.88
발끝의 바위가 우르르 무너지며 내 몸은 다시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뒤쪽으로 쏠리며 머리부터 떨어졌다. 리리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리리나!”
나는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거꾸로 떨어지는 내내, 계속. 떨어지는 내 몸 위로 차디찬 빗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 p.122
우리 꽃구경도 같이 갔잖아. 꽃구경? 꽃구경은 리리나랑 갔는데. 아니야, 잠깐만. 꽃구경은 나아리랑 갔어.
우리는 언덕 위 공원을 향해 걸었다. 기억 속 나와 나아리는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덕길을 걸었다.
아니야, 잠깐만. 리리나는 언덕길을 뛰어 올라갔어. 감기 기운이 있는 나는 못 따라갔고.
아니야, 분명 나아리랑 손을 잡고 언덕을 올랐는데.
아니야, 잠깐만. 아니야, 잠깐만.
기억이 폭포처럼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와 요란하게 소용돌이쳤다. 혼란에 빠진 나를 소용돌이가 삼켜버렸다.
--- p.173
나는 책을 끌어안고 역으로 뛰어들어 전차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기 무섭게 표지를 펼쳤다. 제목이 있는 페이지도, 목차도 휙휙 넘긴 채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낡은 그 저택에는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꽃이 전혀 피지 않는, 이상한 나무였어요.
첫 두 줄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옥죄는 듯했다.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