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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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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318g | 133*203*20mm
ISBN13 9791164797820
ISBN10 116479782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예상외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밖에 없는 집에서 뒹굴며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노란 불빛에 희미하게 비추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스르르 풀어져서, 마치 나를 가둔 틀이 천천히 열리고 내 속을 하나하나 꺼내 서늘한 밤공기 속에 펼쳐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면에 쌓여있던 불필요한 열기와 습기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안정이나 힐링과는 조금 결이 다른, 스스로 정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심각하게 먼지투성이인 방인데, 이 싱그럽고 편안한 느낌은 뭘까. 분명 처음 묵는 장소인데, 집보다 더 집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행복에 파묻혀 잠들었다.
--- p.22

문을 열자 빨간 카디건을 입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귀엽고 동글동글 커다란 눈. 코 위에 계핏가루를 뿌린 듯 잘은 주근깨. 그리고 짙은 밤색의 몽실몽실한 머리카락. 마치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귀엽잖아? 상대가 꼬마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귀여움에 온몸에 긴장감이 돌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중략)
“어어, 그…… 넌 누구니?”
지금 상태에서 이 질문이 최선이었다. 그러자 아이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이름을 안 말했네요. 저는 이에하라 리리나라고 해요. 할머니가 여기서 지내라고 해서 이사 왔어요.”
“할머니라고?”
--- pp.30~32

‘뭐지, 이 느낌.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드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나. 하지만 리리나가 똑같은 말을 하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리리나에게 물었다.
“그렇구나. 나랑 같이 있는 건 편해?”
“응.”
“긴장된다거나 막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구나?”
“응.”
“리리나가 리리나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다면 뭐, 다행이고.”
“그 자체로 있다는 건 뭐, 그런 건가? 사츠타가 리리나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고, 생각대로 안 된다고 화내지도 않고, 리리나다운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 pp.66~67

지금까지의 나는 ‘상실’을 두려워했다. 누군가와 깊이 연을 맺고, 그 누군가의 행복을 항상 비는 관계가 되는 게 두려웠다. 귀찮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만 하고,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느낌. 그런 감정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겠지. 하지만 죽도록 노력해서 이런저런 일을 극복해 누군가와 맺어진다 해도, 영원하지 않다. 반드시 무슨 일인가가 벌어져 그 관계는 소멸한다. 서로가 싫어져 좋았던 관계가 사라지기만 해도 무척이나 괴로울 터인데, 행복의 절정에서 그 누군가를 통째로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상실. 진정한 의미의 상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만들어진 내 모습도 뿌리째 잃게 된다. 상대의 존재와 함께 내 모습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리리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어둠의 틈새로 추락해 떨어지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p.88

발끝의 바위가 우르르 무너지며 내 몸은 다시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뒤쪽으로 쏠리며 머리부터 떨어졌다. 리리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리리나!”
나는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거꾸로 떨어지는 내내, 계속. 떨어지는 내 몸 위로 차디찬 빗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 p.122

우리 꽃구경도 같이 갔잖아. 꽃구경? 꽃구경은 리리나랑 갔는데. 아니야, 잠깐만. 꽃구경은 나아리랑 갔어.
우리는 언덕 위 공원을 향해 걸었다. 기억 속 나와 나아리는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덕길을 걸었다.
아니야, 잠깐만. 리리나는 언덕길을 뛰어 올라갔어. 감기 기운이 있는 나는 못 따라갔고.
아니야, 분명 나아리랑 손을 잡고 언덕을 올랐는데.
아니야, 잠깐만. 아니야, 잠깐만.
기억이 폭포처럼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와 요란하게 소용돌이쳤다. 혼란에 빠진 나를 소용돌이가 삼켜버렸다.
--- p.173

나는 책을 끌어안고 역으로 뛰어들어 전차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기 무섭게 표지를 펼쳤다. 제목이 있는 페이지도, 목차도 휙휙 넘긴 채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낡은 그 저택에는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꽃이 전혀 피지 않는, 이상한 나무였어요.

첫 두 줄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옥죄는 듯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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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 비로소 이별의 슬픔과 마주한 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도 깨닫는다. 이별이란 어쩌면, 떠난 이를 향한 새로운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 최희서 (배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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