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프레베르는 말했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빼앗긴 것만 빼면.’
교사로 살아오는 동안 레나가 하나의 길잡이, 만트라(진리의 말)로 삼아온 말이었다. 아이들이 빼앗긴 걸 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엔지니어, 과학자, 의사, 교사, 회계사, 혹은 농업기술자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마침내 아이들이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교육의 영토에 발을 내딛게 될 때 레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세상을 이끌게 될 거라고. 그러면 세상은 더 넓고 공정한 세상이 될 거라고. 어쩌면 극도로 순진한 데다 지나친 자만심에 사로잡혀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직업에 대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스쿨! 스쿨!”
아이는 계속 외쳤다. 아이가 외치는 소리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카스트 제도를 쓸어버리고, 이 사회가 오랜세월 동안 구축해놓은 신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힘찬 구호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초대하는 약속의 말이자 단지 희망에 그치지 않을 구원의 말이었다. 아이들이 학교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삶은 그들을겨누었던 적의를 거두고 비로소 확실한 미래를 열어 보일 것이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카스트 제도가 부과한 형벌 같은 삶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 pp.20~21
그날도 레나는 해변으로 나갔다. 지난밤에도 불면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상태였다. 얼굴 가득 짙은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눈이 따끔거리고 눈 주위가 쿡쿡 쑤셨다. 은근한 동통 탓에 식욕이 일지 않았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고, 두통이 심한 데다가 이따금 현기증이 일며 눈앞이 핑핑 돌았다. 레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오늘따라 청명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레나는 이제 곧 청명한 하늘을 바라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레나는 자신이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을까? 첫 새벽의 밀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바닷바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정말 몰랐을까? 레나가 바닷물을 향해 몸을 던지는 순간 세찬 파도가 덮쳐오더니 순식간에 넓은 바다로 끌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바닷물에 잠겨 들지 않으려고 몸을 허우적거렸고, 힘껏 발버둥을 치며 헤엄쳐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몸이 자꾸만 가라앉는 걸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남아있는 힘을 짜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여러 날 고통 속에서 불면의 밤을 지내느라 기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라 조금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눈에 잡힌 건 머리 위 하늘에서 자유롭게 펄럭이는 연이었다.
--- pp.34~35
레나는 아이가 불가촉민이라는 이유로 교육받을 기회를 원천 봉쇄당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결심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만큼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이의 부모에게 딸이 총명하고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했다. 아이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의 부모 역시 이 마을의 주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글을 배운 적이 없을 것이다. 레나는 그들에게 문맹이나 무지가 숙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평생 어렵게 살아가는 걸 운명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교육을 받게 되면 스스로 삶을 전복시킬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말해주어야 했다. 부모 세대가 제공받지 못한 배움의 기회를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 pp.63~64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어도 불가촉민을 천시하는 풍조는 바뀌지 않았다. 불가촉민들은 여전히 ‘파리아’, 즉 ‘불순해서 사회로부터 내쫓긴 사람들’로 취급되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보다 더욱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당연하다는 듯 이어져 오고 있었다. 달리트이면서 여자로 태어나는 건 최악의 저주였다. 레드 브리게이드의 단장과 단원들은 몸이 닿아서는 안 되는 불가촉민이었고, 누구나 제멋대로 강간해도 상관없는 여자로 취급되는 잔인한 역설의 희생자들이었다. 가장 나이 어린 단원은 불과 여덟 살 때 이웃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나라에서 강간은 국민스포츠나 다름없어요.”
단장의 목소리에 분노가 짙게 배어있었다.
“달리트는 아무리 끔찍한 강간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요.”
피해자가 달리트일 경우 경찰에 고발해봐야 가해자가 기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 pp.78~79
모든 걸 잃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보자면 레나는 아이와 비슷한 처지였다. 레나도 아이처럼 견디기 힘든 지옥을 겪었고, 지금도 벗어나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고 있었다. 레나가 인도의 남동부 오지까지 떠나온 건 고통을 견디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이곳에 온 레나는 난파한 배에서 홀로 살아남은 가엾은 요정을 만나게 되었다.
식당 주인 부부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했지만 아이의 미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홀리는 비록 말을 하지 못해도 단어를 기억하고 쓸 줄 알았다. 언어는 아이가 고향에서 도망쳐오던 길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못한 짐이었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기꺼이 짐을 짊어졌다. 아이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둔 건 유일한 저항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침묵이 자신을 겨누게 되리라는 걸 미처 몰랐을 뿐이다. 아이는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로 침묵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 pp.93~94
모든 걸 잃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보자면 레나는 아이와 비슷한 처지였다. 레나도 아이처럼 견디기 힘든 지옥을 겪었고, 지금도 벗어나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고 있었다. 레나가 인도의 남동부 오지까지 떠나온 건 고통을 견디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이곳에 온 레나는 난파한 배에서 홀로 살아남은 가엾은 요정을 만나게 되었다. 식당 주인 부부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했지만 아이의 미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홀리는 비록 말을 하지 못해도 단어를 기억하고 쓸 줄 알았다. 언어는 아이가 고향에서 도망쳐오던 길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못한 짐이었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기꺼이 짐을 짊어졌다. 아이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둔 건 유일한 저항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침묵이 자신을 겨누게 되리라는 걸 미처 몰랐을 뿐이다. 아이는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로 침묵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 pp.93~94
랄리타의 학습 진도는 기대 이상으로 빨랐다. 무엇보다 아이의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갈증이 빠른 성취를 이끌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어찌나 뜨거운지 가끔 레나를 깜짝 놀라게 했고, 이따금 감당하기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랄리타는 요즘 레나가 사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그림으로 대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랄리타는 마을을 그렸고, 왕골 바구니를 이고 가는 여자를 그렸고, 밭에서 쥐를 잡는 남자를 그렸고, 어린아이였던 자신을 그렸다. 밤에 부모 곁에서 인형을 끌어안고 잠든 모습이었다. 엄마와 함께 북부 지방을 떠나 이곳을 향해 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그림도 있었다. 랄리타가 그린 그림 속에는 버스 한 대가 있었고, 승객을 짐짝 포개듯 가득 태운 열차의 모습도 있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도시와 거대한 사원도 있었다. 그림 내용으로 보아 랄리타가 엄마와 함께 찾아갔던 사원인 듯했다. 레나의 눈길을 유난히 강하게 잡아끄는 그림이 있었다. 랄리타가 엄마와 함께 마을로 들어서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둘 다 머리를 삭발한 상태였다. 레나는 사원에 가서 신에게 머리카락을 봉헌하는 풍습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랄리타의 머리카락은 다시 길고 탐스럽게 자라 있었다.
랄리타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들을 통해 레나는 아이가 지나온 시간, 좌절과 이별로 점철된 삶을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랄리타는 자신의 소망을 글로 적어 레나에게 보여주었다. 랄리타는 버스 운전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북부 지방에서 이곳까지 온 길을 되짚어 자신이 태어난 마을,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 pp.116~117
레나는 자주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 앞에서 전혀 급할 게 없다는 듯 태평한 얼굴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공무원들을 쳐다보며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공무원들은 레나가 한참 동안 기다린 끝에 내민 서류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서명 하나가 빠졌다거나 한 가지 서류를 더 첨부해야 한다고 태평한 얼굴로 지적했다. 서류를 들고 마을 행정 사무소에 갔더니 일을 처리하려면 첸나이 시청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기도 했다. 첸나이 시청에 갔더니 어이없게도 마을 행정 사무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난 뒤 승인 업무를 맡은 공무원이 아파서 결근했다는 이유로 몇 날 며칠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사무용 컴퓨터가 망가져 수리를 마칠 때까지 업무를 중단한다는 안내를 받기도 했다. 하필이면 필요한 서류를 완벽하게 갖춰 찾아간 날 컴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레나는 교사 시절 가르치던 학생들이 너도나도 몰두하던 ‘탈출 게임’에서처럼 어느 방에 혼자 갇힌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들과 달리 레나는 게임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pp.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