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많은 집을 보여주며 부동산 사장님들이 둘러대는 멘트는 대단히 기발하다.
“계단이 너무 가파른데 올라가다 다치는 거 아니에요.”
“술 안 먹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안 다쳐!”
“방이 너무 좁은데요.”
“책상 밑에 발 넣고 누우면 딱~ 맞아.”
“방 가운데에 기둥이 있어요!”
“피해 다니면 되지!”
‘다행히 배에 구멍 뚫고 자라고 하진 않으시네요…’ 이쯤되니 어째서 이런 집들이 애초에 주거 공간으로 허가가 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p.11 「미션 파서블? 서울에서 전셋집 구하기」중에서
잠시 후 석구는 안경과 두꺼운 잡지, 에프킬라를 챙겨왔다. 나는 “가라 피카츄!”를 외치며 포켓몬을 등 떠미는 〈포켓몬스터〉의 주인공 지우처럼, 석구 뒤에 숨어 “빨리 어떻게 좀 해봐! 저러다 도망간다 도망가!”만 외쳤다. 석구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액수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처럼 “와아아 이거 어떡하냐? 우와아 진짜 이거 어떡하냐”라는 탄성만 반복했다. 석구는 이 집에서 바퀴벌레를 잡을 사람은 본인뿐이라는 책임감과 그래도 이건 진짜 존나 크고 무섭다는 본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바퀴벌레를 잡긴 잡았다. 그 과정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뚜와이씨!! 따쒸!” 하는 고성과 욕설만 흐릿하게 기억날 뿐이다.
--- p.16 「구옥은 위험해」중에서
우리 집을 채우는 모든 것들은 생활의 영역과 사치의 영역으로 나뉜다. 옷장은 생활, 무드등은 사치, 냉장고는 생활, 인센스는 사치, 선풍기는 생활, 액자는 사치…. 가격과 상관없이 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사치의 영역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집이 좁을수록 생활의 영역에 해당하는 물건의 비중이 높다. 지인 중에는 집이 좁아, 잘 때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잔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은 그 정도로 좁진 않지만 그렇다고 둘이 살기에 넉넉하지도 않다. 그래서 석구와 나는 가끔 거실이나 부엌 같은 공용 공간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 p.46 「오늘의 (좁은)집」중에서
나와 석구는 다달이 25만 원씩 생활비 통장에 입금한다. 우리의 생존이 달린 비용이라는 뜻으로 계좌 이름을 ‘생존비’로 정했다. 생존비 통장에서 매달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관리비, 식비, 인터넷 요금 등이 빠져나간다. 다 빠져나가면 매달 5만 원 정도가 남는다. 이 돈은 모아뒀다가 명절이나 어버이날, 부모님 생신 등 지출이 많을 때 보탠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꽤 순탄하게 가계를 경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기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가정(통장 파탄)의 달 5월, 우리의 생존비는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4월에는 아빠 생일과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이 있었다. 나는 5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돈이 없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빵떡이 힘을 모아 겨우 어버이 날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 통장들이 ‘아이구 이눔아, 그것만은 안 된다!’고 소리치는 환청이 들렸다.
--- p.75 「생활비를 사수하라」중에서
세탁된 수건들을 건조대에 쫙 널고 보니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한 세균 배양액을 전시해 놓은 것 같았다. 다행히 그 후로 쉰내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밖에도 내가 해 먹은(?) 집안일들이 꽤 있다. 뜨뜻한 물에 빨아 아동용으로 만들어 버린 니트, 기름국이 된 감바스, 지옥에서 온 오코노미야키, 라따뚜이가 될 뻔한 토마토 용암탕… 집안일 실력은 언제쯤 느는 것일까? 욕심과 재능이 없는 건 확실하고. 재미를 약간 느낄 때가 있으나 그 재미는 곧 재앙이 돼 버리니….
--- p.103 「내겐 너무 어려운 집안일」중에서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지하철에 실려 9시에 강의실에 도착하면 난 이미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쓴 상태였다. 수업 시간에도 정말 많이 졸았다. 얌전히 조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앞뒤 좌우로 흔들어 재끼며 졸아서 그 시절 내 별명은 ‘법학관 디스코팡팡’이었다. 별명 하니 생각나는 게 또 하나 있다. 경기도민으로 살면서 통금 시간까지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해지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술자리에 낄 때도 팀 프로젝트를 할 때도 나는 곤란한 상황에 자주 처했다. 밤 10시면 술자리 분위기는 무르익고, 팀 프로젝트도 한창 열을 올릴 때인데 그때쯤이면 나는 집에 가야 했다. 친구들은 좀 더 남아 있으라고 핀잔을 줬고, 반대로 부모님은 빨리 오라고 성화였다. 날 두고 양쪽에서 팽팽히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부모님 말씀을 거스를 패기가 없었기 때문에 10시만 되면 쭈뼛거리며 자리를 떴다. 덕분에 ‘십(10)데렐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 p.115 「나의 경기도 해방일지」중에서
반려동물로 달팽이를 기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달팽이’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주름 개선에 좋은 달팽이 크림’과 ‘프랑스 달팽이 요리’가 뜬다. 달팽이에게 주려고 ‘달팽이 영양제’를 검색해도 달팽이로 만든 영양제밖에 뜨지 않아 죄 많은 인간으로서 미안해지곤 한다. 내 생각엔 이게 다, 사람들이 반려 달팽이의 매력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느린 움직임 때문인지 달팽이를 무기력한 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달팽이들은 컨디션이 좋으면 자기 집의 벽과 뚜껑에 달라 붙어 뽈뽈뽈 기어다닌다. 그 큰 패각을 등에 지고도 거꾸로 매달려 있다니, 대단히 활력이 넘친다. 유리 벽을 밀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느라 뽀득뽀득 소리도 난다.
--- p.133 「나의 반려 달팽이」중에서
본가에 갈 때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얼굴이 어째 더 못 쓰게 됐냐” 벌써 나와서 산 지 1년이 넘었는데… 엄마, 아빠 말대로라면 얼굴이 매주 못 쓰게 되어 지금쯤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애초에 어디 쓸 얼굴은 아니었어…” 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모님은 자기 자식 한정 ‘저번 주보다 더 말라 보이는 착시현상’을 평생토록 경험하고 계신다. 실제로 나는 자취하기 전보다 5킬로가 더 쪘다. 그도 그럴 것이 본가에 올 때마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 주는 반찬만 다 먹어도 삼시 네끼가 부족한데, 거기다 배달 음식까지 야무지게 시켜 먹으니… 내 얼굴은 번들번들 광이 날 지경이다.
--- p.147 「우리 집의 규칙」중에서
수도승처럼 조용하고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다 보면 성취감을 느낄 일이 딱히 없다. 하지만 내 손으로 뭔가를 해내는 감각은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성취감을 느낄 일을 일부러 만들었다. 이불 정리나 설거지, 방 청소, 전자레인지 위 먼지 닦기, 인덕션 청소, 물때 청소처럼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기분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들에서 뿌듯함을 충전했다. 예전에 취준생일 때는 ‘지금은 취업 준비에 집중하고 이런 건 취업 성공하면 해야지’라며 모든 필요한 일, 좋은 일을 취업 후로 미뤘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내 삶을 취업 후로 유예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삶은 취업 후에 있고, 지금은 준비 기간 같은 느낌. 하지만 인생은 계속 흐르고, 모든 순간이 진짜다. 유예되는 삶은 없다.
--- p.198 「퇴사자 인 더 하우스」중에서
흥에 겨워 독립할 준비를 하는 나와 석구를 보며 아빠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나와 석구가 집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밤새 온더락으로 조니워커를 마시고, 대마초를 말아 피며 마약 밀매를 하는 상상을(만약 아빠에게 하이틴 영화를 보는 취미가 있다면 이런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혹은 나와 석구가 종일 먹지도 씻지도 않고 게임만 하다가 사회와 단절되는 상상을 할 수도…. 그러나 우리가 독립 후 시행한 일탈이란 그저… 나물 반찬 없이 스팸만 구워서 아침 먹기, 밤에 치킨 시켜 먹기, 주말에 10시까지 자기, 닌텐도 5시간 하기, 일주일 동안 청소 안 하기, 옷 안 걸고 바닥에 던져 두기 정도다. 쓰다보니 너무 소소해서 눈물이 난다.
--- p.213 「부모의 상상은 현실이 안 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