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7일간의 급행 휴가,유산으로 받은 해변 아파트 그리고 한겨울 연말연시의 ‘서핑’공유 오피스를 운영하는 다국적 스타트업 기업을 다니는 ‘나’는 ‘홀로연말족’을 면하고자 양양으로 향한다. 때는 2020년 12월 23일. 수요일이고,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이었으며, 코로나 확진자 수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는 3차 대유행의 시기였다. 그러나 7일간의 급행 휴가를 쓴 건 사실은 ‘유산 상속’ 때문이었다. 피상속인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아니라 다름 아닌 큰이모. 이모의 죽음은 자살이었고, 유산 대리인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큰이모에겐 직계존속, 직계비속, 배우자, 형제자매가 모두 없어서 조카인 내가 상속인이 되었다. 그렇게 내게 해변 아파트가 생겼고, 나는 양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미친 듯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미치도록 무료한 일상을. 번아웃이 와도 멈출 수 없는 번아웃을. 공허를. 때론 분노와 억울함을.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어디에도 점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외로움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수시로 찾아드는 막막함, ‘누구나 아파요’라는 인터넷 댓글을 보고 밀려오는 먹먹함에 나는 줄곧 갇혀 있었으니까.“일상의 투쟁들을 잠시 멈춤”하고온기를 찾아 모여든 단톡방의 ‘분홍 코끼리’들그래서 양양으로 오게 되었다. 나의 생의 이력은 조금은 남달랐는데, 해양학 연구원인 아버지를 따라 서핑의 나라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열 살 때까지 자랐다. 그러나 서핑을 해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우연치 않게 한 게스트하우스의 서핑 강습에 가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해파리, 돌고래, 우뭇가사리, 상어 등의 닉네임으로 불리는 회원들을 만난다. 한겨울에 그것도 연말에, 서핑을 하겠다고 모인 서핑 초보들이라니. 처음부터 쉬운 일이란 없겠지만 이들의 서핑은 예상대로 허술한 모양새다. ‘나한테 말 걸지 말았으면’ 하는 분위기를 풍기며, 서핑 강사 양미 씨의 말대로 ‘좀 어두운’ 낯빛을 한 사람들.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거나 플로깅을 할 때엔 조금 밝아지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에고서핑’의 시간에 이르러 비로소 언 마음을 녹이는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거리두기 3단계 격상을 앞둔 시기, 사무치도록 ‘인간의 온기’가 그리웠던 건 아닐까. 강습이 끝난 뒤에도 계속 만남을 갖자며, 술 취해 헛것이 보이는 섬망 증세를 뜻하는 ‘분홍 코끼리’라는 이름의 단톡방을 만들었듯이.허세와 지식 자랑, 센스 있는 척까지 골고루 겸비한 해파리, 무기력해 보여도 양양 맥주를 만들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한 돌고래, 검정 롱패딩 붐만 믿고 옷 장사를 했다가 망한 우뭇가사리, 까칠하지만 솔직한 ‘여자 어른’인 상어, 거기에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의 대환장 구간을 탈출해 여기 양양으로 달려온 직장인 ‘나’까지. “안쓰럽고도 가련한 일상의 투쟁들을 잠시 멈춤”한 그들만의 서핑 바이브가 펼쳐진다.‘이게 사는 건가? 이게 사는 거지!’서핑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파도를 탄 서퍼다『서핑하는 정신』은 본격적으로 서핑을 하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서핑을 시작하기까지와 서핑을 하고 난 후에 방점이 찍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서핑이란 “서핑을 하기 전, 하는 중, 하고 난 이후의 삶”까지를 아우르는 것이기에. 그렇게 작가는 ‘서핑’이라는 개념을 다양하고도 입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화두들을 무겁지 않게 건드리며 예리한 통찰들을 곳곳에 심어놓는다. ‘이제이’라는 인물이 들려주는 부모의 죽음, 유산 상속, 직장생활, 번아웃에 관한 이야기들은 언택트, 인스타그램, 공유오피스, 한달살기, 워케이션, 플로깅 등 최근의 트렌드와 어우러지면서 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소설 속 한 정의에 따르면 서핑하는 정신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정신”이기도 하지만, ‘서핑하는 정신은 ____이다’로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찾아내는 ‘서핑’에 관한 진짜 의미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므로. 이제 다시, 서핑을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