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사슴이 뿔을 가는 달이다. 칠월은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이며 산딸기 익는 달이다.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이다. 칠월의 달력엔 울창한 숲 속의 검은 나무둥치들 사이로 햇빛이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 빛에 눈이 멀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김요옥은 얼른 두 손으로 눈앞을 가린다. 그리고 눈을 꾹 감은채 달력에 씌어진 대로 읊조려본다. 칠원은 사슴이 뿔을 가는 달이며 칠월은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이라고, 마치 인디언들처럼 김요옥은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팔을 내려뜨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달력 속의 나무들은 지나치게 까맣고 어둡다. 인디언들이 부르는 칠월의 노래를 연신 되뇌어 봐도 적들로 가득한 한밤의 숲 속에 홀로 남겨진 듯 사뭇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저 먼 곳의 인디언들은 칠월엔 어디로 떠날까. 빈 천막 안에 남겨진 밥공기며 침구며 낡은 옷가지들과 신발은 누가 지킬까. 김요옥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제 칠월이다. 어쩌면 열매가 빛을 다 저장하기도 전에 누군가 천막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김요옥은 혼자 옲조리며 달력에서 비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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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남자들도 거기 사투리가 그런 건지, 친한 척하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한 두번만 만나 얼굴을 익혔다 하면 단박 반말지거리야. 왔나, 갔나, 묵었나, 봐라 이런 식으로, 영감님은 처음부터 석 달을 산 지금까지 깍듯이 보소, 드소, 갔다 오소,하는 식으로 존대말을 쓴다우. 그게 얼마나 듣기 좋다구. 우리 둘이 말을 많이 해. 할 얘기가 왜 없어. 지가 즈이 마누라 얘기하면 난 우리 남편 얘기도 하고, 한 얘기 하고 또 해도 싫증이 안 나. 우린 서로 얼마나 열심히 들어준다고, 듣고 또 들어도 재미나니까. 그러다가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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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한반도, 이곳 사람들의 심성과 행동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사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가족주의다. 이런 담언을 과거시제로 표현해야 할지 현재시제로 표현해야 할지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이혜경의 매력적인 단편 「대낮에」는 바로 그 과거와 현재,혹은 미래사이에 떠 있는 가족주의의 집요한<유령>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주의는 이 나라 사람들의 치열한 노동 혹은 행복 추구의 원동력이며 경쟁력이다. 그것은 동시에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정치, 지역주의,반시민적 이기주의,파행으로 치닫는 교육열의 출발점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가족주의는 어느 면 거의 이 민족의 한 유전적인 형질, 혹은 원죄라는 인상마저 준다. 우리의 힘이요 멍에인 가족의 틀에 관하여 이혜경은 애증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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