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키던 외삼촌은 마른 땅처럼 척박한 엄마의 손등 위로 억척같이 붙어 있는 핏줄의 굴곡을 보며 ‘80대 할머니 손 아니냐!’며 가슴을 쳤다. 엄마의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는 정의되지 않은 감정들, 묻어 두었던 그 억울함의 조각들이 덜컹거리며 굉음을 낸다. 탁한 과거가 소환될 때마다 질식되지 말고 걸러지면 좋으련만. 맑은 공기가 주입될 거름망, 나의 귀와 마음을 연다. 다 게워내면 좋겠다. 찢겨 너덜해진 마음이 회복되고 맑은 날숨과 들숨이 오가며 엄마의 여생이 가벼워지길 바란다. 외롭지 않게 그리고 맑고 투명하고 자신 있게.
--- p.18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어 헌신했던 엄마에게 반갑지 않은 긴 휴가가 찾아왔다. 어쩌면 누군가가 이렇게라도 엄마를 쉬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엄마는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자식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잊고 싶은 힘든 기억이었을까. 아직도 나는 볕이 환하게 들던 병실의 차가움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의 서 여사답게 작은 기적이 우리 가족을 찾았고 지금은 나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으신다. 내가 문을 잡아도, 화분을 옮겨도, 전화를 드려도 ‘미정아, 고마워. 사랑해’하고 작은 것을 더 귀하게 보아주는 울 엄마.
--- p.25
엄마! 깜깜한 산길을 비추는 보름달처럼 내 인생의 나날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수분처럼 흘러넘친 엄마의 사랑 덕분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어요! 하해와 같은 그 사랑 갚을 길은, 나도 내 아이들에게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주는 거겠죠? 그 사랑 잊지 않고 나눠줄게요. 인선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길 오늘도 기도합니다. 저의 기도와 성장을 지켜보며 토닥거려 주며, 오래도록 곁에 계셔주세요.
--- p.40
안마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씨’를 연발하며 인상을 찌푸렸던 열 살 무렵의 딸. 아빠와 이혼 후 생활비를 빌리러 왔던 엄마에게 “창피하니까, 가!”라고 지껄였던 스물두 살의 딸. 인생 하소연하는 엄마에게 “그랬겠네.” 한 마디로 뭉뚱그려 버리는 지금의 딸. 160이 안 되는 키, 누런 이, 기근과 가뭄의 땅을 닮은 손등을 지고 있는 몸뚱어리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냥 전화해 봤다는 말로 마무리되는 하루 1분 통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 p.56
술기운을 빌어 인생의 험난함을 탓하던 아빠의 모습이, 엄마는 두렵고 가슴 아팠을 것 같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아픈 곳도 많아진 엄마이지만, 뇌경색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심해진 아빠도 보살펴야 하니 마음 편할 날이 없으시다. 의지할 데 없이 지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글의 힘을 가져와 엄마를 향한 내 진심을 토설해 보는 것이다. 엄마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고개를 끄덕여주는 공감, 많이 힘드셨을 거라는 위로, 엄마 곁에서 그늘이 되어 주겠노라는 다짐, 엄마의 세월을 인정하는 감사의 말들 말이다.
--- p.59
아, 그랬구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늘 엄마의 등에 업혀서 지내온 거였구나. 생각보다 더 많이 엄마 등딱지였구나. 물론 초등학교 입학한 후로도 엄마는 나를 자주 업었다. 내가 엄마에게 업힐 수 없을 정도로 클 때까지. 이렇듯 내 일생에는 무수한 엄마의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엄마의 등이 있다. 내 기억에는 특히 바람이 거셌던 태풍이었다. 어디를 가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엄마와 나는 함께 집을 나섰다. 어딘가 목적이 있었으니 그 태풍에도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렇지만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바람에 맞서 간신히 서있을 뿐이었다.
--- p.64
너는 통 큰 유리창을 통해 비 내리는 풍경 보며 감성에 젖어 드는 걸 좋아하게 될 거야. 예술적인 감각과 클래식 음악에 깊이 빠져드는 걸 보면, 옛 선비의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유전인자가 많은가 봐. 생전 처음으로 엄마 배 속에 있는 너를 이렇게 오롯이 바라보다가 네가 정말 사랑스럽고 고귀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단다. 늦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환한 미소로 반겨주고 안아주고 싶어. 이후의 삶이 너에게 실망을 주거나 힘들게 할지라도 너의 존재 자체가 눈물 나도록 고맙고도 감사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렴.
--- p.76
본성은 긍정이나 부정, 선이나 악 등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진아, 무아를 뜻한단다. 무아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로 베이스, 온전한 가능성의 상태를 말해. 특정한 어떤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 그래서 무아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하고 창조될 수 있는 거란다. 어떤 의미에선 과거는 없어. 오지 않은 미래도 사실 존재치 않아. 오직 지금 현재만이 있을 뿐이지. 너는, 지혜로운 너는 일찍이 그것을 간파하고 그러한 삶의 태도로 세상을 살고 있어 참으로 고맙단다.
--- p.92
살아가면서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깊은 상처로 스며든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 자체로 존귀한 정숙아,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들은 너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 진짜 네가 아니란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순간순간이 너의 존재가 될 거라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한다. 너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감사하고 기특하단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사과 꽃을 피우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 따뜻한 사랑의 온기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지? 짱짱하게 살아갈 너의 미래에 고맙다는 말을 미리 전한다. 지금처럼 앞으로의 삶도 노래하며 춤추며 유쾌하게 살아가자. 사랑한다 정숙아.
--- p.102
너에겐 각 사람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긍정의 마음이 있단다. 사람 사람마다 숨어있는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빛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너에게 가장 든든한 연결고리의 원동력이 되어 줄 엄마를 잃고 많이 힘들었지? 그 깊은 슬픔을 통해 정서적으로는 더 깊은 포용을 배웠고, 너는 온전히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 p.112
삶의 마지막 순간, 후회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가족에게 사랑한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 후회 된다던 언니의 마지막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꺼져가는 숨을 내뱉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이어갔던 마지막 말.
엄. 마. 미. 안. 해.
내가 생에 눈을 감게 되는 순간, 하얗게 바래진 백지 위에 살아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때, 어떠한 후회도 없이 그 순간이 자연스럽고 평화롭길 바라본다.
--- p.140
굳어 있는 사고, 좋지 않은 입버릇, 예쁘지 않은 신체언어 등 스스로는 불편함을 못 느끼지만 버리면 더 나아질 것들이다. 또 버리면 좋을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실행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다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비포장 도로같은 인생길을 탄탄대로로 만들기 위해 나의 선택과 행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 p.143
얼마 전 20대 친구가 쓴 블로그 글이 내 심장을 건드렸다. “자꾸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냥 했기 때문이다. 일단 하고 나서 방법을 물었으면 좋겠다.” 친구의 말은 20대 때 일단 하고 보는 나의 본성을 깨어나게 했다. 그동안 서랍 안에 숨겨놨던 ‘행동하는 용기’라는 보석을 꺼내 이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는다. 이 용기로 설령 다치게 되더라도, 즐거운 모험에 대한 대가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행동하는 용기’ 덕분에 나의 내적 유산들이 더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행동하는 용기가 벌써 숨을 쉬기 시작한 것 같다.
--- p.147
할머니는 에메랄드빛 바다 같다. 평생 갯벌에서 조개를 캐던 할머니가 나에게 준 온정의 터전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닮아있어서이다. 어둠이 내리며 가려지는 바다의 애틋함과 박명이 일어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이 할머니를 감각하는 나의 감정이다. 바다에는 할머니와 나와의 한 시절이 담겨 있기에, 귀한 보석이다. 그 속에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면, 스스로에게 숱한 질문을 던지며 찾아낸 가장 나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그러했듯, 나도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 p.154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 햇빛과 물이 충분한 봄과 여름에는 나이테의 폭이 넓게 연한 원이 생기고, 그렇지 않은 늦가을과 겨울에는 진한 원이 생기는데 이것을 통해 나무의 나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한 나무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는 나이테를 우리가 확인한다는 건 나무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생명이 끝났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한 줌의 뼛가루다. 그것으로 한 사람의 삶의 과정을 추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이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남겨 놓으려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해.
--- p.157
초고속으로 발달하는 세상 속에서 휘황찬란한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멋지게, 재밌게, 부럽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SNS에서 넘쳐난다. 볼 것이 많으니 재미도 있지만, 그 안에서 오는 상실감, 열등감, 자책도 크다. 바깥세상을 덜 보고, 내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며,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다. 뜻밖의 질문에 ‘뭐시 중헌디?’를 되뇌며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것이 질문의 묘미일까?
--- p.161
죽음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했던 소녀는
상실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미워했다
마음가득 수치심과 원망으로 가두었던
지난날의 아픈 기억 속에서 이제 풀어주려 한다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길 바라며
어린 소녀를 꼭 안아주며 용서하고 싶다
--- p.180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고
엄마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게만 해드리고 싶고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
남편의 마음도 헤아려주며
나로도 잘 살고 싶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지난 세월 후회하며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철없던 시절의 나를 용서하려 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되지
--- p.194
“너는 누구야? 처음 보는 친구구나.”
나를 보더니 노란 얼굴에 초록 신발을 신은 호박이, 하얗고 길쭉한 콩나물, 핑크빛 옷을 입은 생채, 초록 빛깔 상추, 노란 혹을 달고 있는 계란, 수줍음 많은 고추장까지 하나 둘 모이는 거야. 마지막으로 방앗간에 다녀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참기름이 왔어.
그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리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지.
“우리는 이제 비빔밥이 될 수 있어!”
--- p.219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좋은 친구란다.”
바다 속 친구들의 따스한 말을 들은 삐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어요. 깊은 바다 속은 더 이상 남색어둠이 아니었어요. 삐쮸는 융단 같은 바닷물에 몸을 맡겼어요. 두둥실 두둥실 편안하게 누워 헤엄쳐 다녔어요. 바다친구들의 합창에 맞추어 문어와 손을 잡고 흐느적 춤추며 까르르 웃다보니 삐쮸의 마음은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어요.
삐쮸는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삐쮸가 초록섬에 돌아가더라도 깊은 남색바다 속에서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기억하겠지요? 그곳에서 만끽했던 자유도요.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