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은 나를 주의 깊게 뜯어보았다.
“내가 왜 불렀는지, 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사령관님.”
“정말 짐작이 안 갑니까?”
“안 갑니다.”
사령관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더니 우리별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 보는 건 어때요?”
지구로 돌아가다니! 지구로의 귀환은 화성 콜로니가 적어도 한 세대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누가 이 이야기를 읽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설명을 조금 덧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화성에 살고 있다. ‘화성 콜로니’라 부르는 이곳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학자들의 공동체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십중팔구 우리가 우주에 남은 마지막 인류가 되어버린 듯했다.
--- p.8
더는 용도 불명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 요즘에는 용도 불명들에게 자신보다 능력이 나은 사람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그럼에도 콜로니 내부에서는 이 같은 잔인한 농담이 유행처럼 돌고 돌았다. 용도 불명 + 1 =0.
--- p.29
삐익- 미사일 접근을 알리는 레이더의 연이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나도 놀라지 않았다. 조모를 태운 우주선이 지구에 다가갈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조모들을 태운 우주선에 장착된 전자 반격 장치와 도피 조작으로 지난번에도 첫 번째 미사일은 쉽게 피했고, 미사일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아니 나를 태운 우주선은 그때와 똑같은 장치에 시동을 걸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미사일이 궤도를 바꾸더니 나를 향해 되돌아 왔다!
--- p.50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빠와 나눈 마지막 대화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빠는 나지막이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아들아, 항상 자신의 힘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특히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할 때라면 더욱 그렇지.”
“그런데 아빠, 난 고작 용도 불명일 뿐인걸요.”
아빠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제일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자주 있는 법이지.”
지구 역사 공부 또한 아빠가 좋아하는 취미였다.
--- p.62
유를 향한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순간들을 제외하면, 나는 이 섬 주민들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깨달았다. 이 섬에서 나는 더는 용도 불명이 아니었다.
--- p.89
“이런 젠장, 제발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들이나 말해보라고요! 조모들이 있는 섬의 좌표와 당신이 있는 섬의 좌표를 보낼게요.”
몇 초 뒤, 지도 한 장과 몇 가지 숫자가 화면에 나타나자, 나는 얼른 그것을 내 기억 속에 저장했다. 조모들이 있는 섬은 내가 있는 섬에서 북북동 방향이며, 거리는 이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 두 섬 사이에는 다른 몇몇 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섬에 갈 수 있을까요?”
나는 사령관의 답을 기다렸다.
“항해를 해요!”
사령관이 버럭 악을 쓰는 순간 세찬 파도가 캡슐을 때리면서 사령관의 얼굴이 금세 물에 잠겼다.
--- pp.125~126
산속 마을을 방문한 이후, 나는 좀처럼 평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마다 몹시 힘들었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깨기 일쑤였는데, 대체로 유가 나로부터 멀어져가거나 사라져버리는 꿈을 꾸고 난 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이 깨는 것이었다. 이 낙원 같은 곳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괴롭혔는데, 그건 콜레트 사령관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기만적인 에로스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점점 더 견디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 p.146
“그러니까 너도 역시 나를 죽이고 싶다는 거지?”
전사가 비아냥거렸다. 그 모습에 내 안의 무언가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네가 그걸 원한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앗,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다니!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군중 사이에서 놀라움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 pp.203~204
“나이 먹은 그의 사진이라면… 혹시 인위적인 노화 프로그램 같은 거야?”
“그런 게 아니더라고. 내가 확인했어.”
“혹시 자기가 알아낼 수 없는 더 앞선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 거라면?”
그의 가설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나, 미처 그런 것까지 확인해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그 사진을 한 번 더 살펴보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아니면, 이미 존재했던 사람의 사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 p.211
“그런데 왜 이곳에 파견할 인물로 당신을 선발했을까요?”
“콜레트 사령관이 나를 선택했고, 아테나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내가 언어를 구사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데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더군요.”
중위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뭔가 미심쩍어하는 눈치라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 p.251
아테나는 자유와 능력의 무거운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점점 더 자주 느끼는 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 속에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기회를 찾아내고 싶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고, 나도 잘 모르는 무언가에 항거하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느껴지니 하는 말이다.
--- p.275
나는 “어떻게?”는 찾아냈으나, 여전히 “왜?”는 찾아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카반이 예견했듯이, 꼬리까지 잡혔다. 아테나 여신이 결국 자신의 생각의 미로에서 알짱거리던 생쥐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독방에 갇힌 채 피할 수 없는 처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과민성 완화치료 한 번이면 로뱅에 대한 나의 사랑은 모조리 날아가버릴 것이다.
--- p.297
“아냐.” 쥘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니라니, 뭐가?”
“우리 대화는 녹음되지 않는다고.”
“그건 왜?”
“알마.”
“알마한테 부탁했어?”
“사실, 나는 스탄한테 부탁했고, 스탄은 알마한테 부탁했지.”
사랑이란 얼마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인가. 게다가 그 사랑을 포기한다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쥘마의 눈길에서 다시금 느껴지는 그 사랑만 봐도 그건 확실하다.
--- p.355
창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휑한 벌판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 시커먼 하늘 아래로 뭉툭한 봉우리 몇 개.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고장인가?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너무 무섭기도 했다. 체온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가 바닥나면 나는 군용식량처럼 냉동된 채 죽게 될 것이다….
--- p.364
나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엄청난 무게의 의무감이 나를 짓눌렀다.
바로 자유의 무게.
자유연애냐, 진보냐? 안분자족이냐, 야심이냐?
한 사회에서 질투나 경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촉발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불평등으로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내가 확신하는 거라고는 소외되는 사람, 용도 불명, 잉여 인간이 없는 세상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 p.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