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42
나는 순수한 애정과 즐거움 대신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독자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게 일종의 직업병이라며 투덜대고 있었지만, 혹시 이 불순한 독서가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잘못 탄 버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시의 낯선 장소로 나를 데려가주는 것처럼. 나는 이 책들에 실려 뜻밖의 세계로 자주 향한다. 의외와 우연의 영역들, 그것은 불순한 독서의 즐거움이다.
--- p.160
세계의 중심에서 과학자나 군인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그것으로 인류와 외계 생명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보다는, 변두리에 있는 평범한 인물이 모순적 상황과 세계와의 갈등에 처하는, 그러나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것은 읽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사랑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을 들게 했다.
--- p.175
세계의 이상한 구석과 결함, 미지의 무언가, 괴기한 현상을 마주쳤을 때 덮어놓거나 도망치거나 “그냥 그런 거야” 말하지 않고 끈질기게 파고들어 알고자 하는 태도가 SF의 근저에 있다. 물론 삐끗하면 그것은 대상을 정복하거나 통제하려는 일로 이어지기에, 이해는 늘 위태로운 줄타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해의 한계까지도 직면하면서 세계를 알아가려는 SF의 인물들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미지의 영역은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결코 낯선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 나는 그것을 SF로부터 배웠다.
--- pp.176~177
나를 울게 하고, 웃게 하고, 가슴 벅차게 하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쓰고 싶은 나’를 새롭게 발견한다. 한 사람의 마음을, 내면 세계를 흔들어놓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채 떠나버리는 어떤 이야기들, 나는 이런 것을 쓰고 싶었지. 나는 성실하게 읽는 사람이 되고, 그러면서 쓰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 pp.189~190
한동안 나에게 서평 또는 리뷰 읽기란 떠나고 싶지 않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세계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거기서 천천히 멀어져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계속 이 안에 머물 수는 없더라도 언제든 이 기억을 돌려 볼 수 있게 정제하는 독후 활동이라고 할까.
--- p.197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는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 p.234
심지어 나는 내가 떠나온 언덕 동네의 그 작은 원룸,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작업실을 가끔 그리워한다. 작아서 모든 책을 다 꽂을 수 없었던,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책들만 꽂혀 있던 책장. 가끔 친구들을 재워주기도 했던 엉성한 소파베드. 몇 분만 걸으면 최고로 맛있는 파스타를 파는 동네 식당이 나오고, 조금 더 걸으면 경치 좋은 카페가 많은, 과일을 사러 마트로 내려갔다가 우연히 장보는 엄마를 마주치기도 했던 그곳.
--- pp.268~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