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 고통을 느끼면 어떡하죠?”
“수확할 때 죽는 쥐들은 어쩌죠?”
“동물성 제품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쓰거나 차를 운전하는 것도 거부하시나요?”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떡하고요?”
“주변에 사는 고양이가 자연스러운 원인으로 죽었다면, 그 고양이를 모자로 만들어 쓰는 건 비건다운 일일까요?”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가에 따라 이 질문들은 정말 궁금해서 생겨난 것일 수도, 도덕주의라고들 취급하는 것에 빈틈을 내고픈 마음에 던지는 것일 수도, 아니면 단순한 농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은 바로 기간이 얼마가 되었건 간에 비건으로 생활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질문 가운데 최소한 하나는 들었을 거라는 점이다.
--- p.23
러므로 이 책에서 나의 목적이란 과거에 내가 좀 더 사려 깊게 다뤘어야 했다고 생각되는 비거니즘에 관한 질문에 단순하게 반격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책은 상상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비판에 맞서 비건 실천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깔끔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비거니즘이 제기하는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복잡한 사안들을, 동시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시점에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비거니즘이 식문화의 한 형태로서 지니는 고유함을 파악하려면, 역설적으로 비거니즘을 식습관 그 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이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할 것이다: 이는 그저 비거니즘이 음식을 넘어서서 동물 윤리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거니즘이 기존의 인간-동물 관계를 비판하는 폭넓은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비건 실천을 둘러싼 긴장감을 파악하려면 비거니즘을 고작 식습관으로 축소하려는 시장, 구체적인 사회적 형성, 제도, 또 비인간 동물에 관한 특정 담론과 끊임없이 타협하는 무언가로 비거니즘의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
--- p.25
비건 협회의 초기 작업이 강조하는 것은 현재 비거니즘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개념 가운데 일부가 어떻게 비거니즘을 식습관 이상의 무언가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는가다. 여기서 비거니즘은 단지 먹는 데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며, 주로 인간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동물과의 모든 관계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비건 실천은 역사적으로 단지 특정한 동물 제품을 거부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들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해 보다 근본적인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했다.
--- p.30
예를 들어, 부상하고 있는 학문적 장인 비건학은, 『비건학 프로젝트』(2015)의 저자 로라 라이트가 얘기하듯이, 인간과 동물의 억압이 ‘뒤얽혀 있다’는 인식에 중점을 둔다. 더 나아가, 아프 코의 『동물학적 마술로서의 인종차별』(2019)은 이렇게 얽혀 있는 모습이 실제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백인지상주의가 동물성 담론에 확고히 기반을 두고 있는 방식을 설명하는 예리한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보여주며, “동물이란 언제나 편리하고 변화하는 기표이며, 지배계층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어떤 집단이든 즉시 이 꼬리표로 낙인이 찍힌다”고 주장한다.
--- p.35
식물 기반 식사를 곧바로 ‘크루얼티 프리’라는 틀 안에 넣는 것도 미심쩍다. ‘크루얼티 프리’ 라벨에 대한 하퍼의 비판에 공명하며 화이트는 여러 유럽 국가에 퍼져 있는 과일과 채소 재배 지역 농업 노동자들이 끔찍한 학대를 겪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화이트의 질문처럼, “비거니즘이 인간이나 비인간동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면, 또 실제로는 더 높은 수준의 고통과 착취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21세기 비거니즘은 과연 가장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또는 실제로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
--- p.41
그러므로 비거니즘을 ‘식습관 그 이상’으로 바라보는 비건의 역사와, 비거니즘이 지닌 급진적인 잠재력을 침잠시키는 최근 식물 기반 자본주의의 반복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인간과 동물의 억압이 지닌 물질적, 담론적, 기반적 연결에 관한 다채로운 비판적 질문이 깃들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초기 풀뿌리 형식의 비거니즘일지라도 비판에서 제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비건 실천이란 그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비판받아 온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 p.48
애덤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가 “부재 지시대상”이라 규정한 메커니즘에 의해 여성과 동물은 현재의 문화 속에서 대상화된다. 애덤스는 포르노그래피 비판을 바탕으로 삼아, 여성의 신체가 전면이나 중심에 놓이는 경우는 많으나, 이들의 행위성이나 주체성은 삭제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탈맥락화된 동물의 일부가 문자 그대로 소비될 때도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지각이 있는 동물로서의 흔적은 모두 삭제되는 데 반해, 신체 부위는 먹을 수 있도록 다듬어지기 때문이다(대체로 이런 제품의 기원을 파악하기 모호하게 만드는 형태나-소시지, 햄버거- 심지어는 이름을-돈육, 우육- 취함으로써 말이다). 애덤스의 프로젝트는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에코페미니즘의 핵심 목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즉, “성차별, 이성애중심성, 인종차별, 식민주의, 장애차별주의가 종차별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또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방식을, 그리고 이런 힘들이 교차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 폭력을 줄이고 보다 정당한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다루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에코페미니즘과 비건 정치를 연결하는 것에 대해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p.75
따라서 에코페미니즘과 유사하게, 특정 인간 집단의 타자화와 억압에 맞서려면 이들이 동물과 연관을 맺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을 한다(그렇게 하면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만 하는 낙인을 찍는 라벨인 ‘동물성’이라는 개념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대신, 동물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동물과 특정 인간을 합법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 만드는 폭력적인 배제와 더 지속적으로 다투기 위해서는 말이다.
--- p.96
다시 말해, 쇼트웰은 사람들이 구조적 폭력이나 광범위한 사회·환경 문제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면제받고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이나 신념에 비판적이다. 쇼트웰이 보기에, 우리가 개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건 간에 우리는 시스템 차원의 문제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구조 안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북아메리카나 서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은, 개인이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자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건 간에 지우기 어려운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이를테면 재생 가능 에너지 공급사로 옮긴다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든지, 동물 제품 소비를 줄인다든지 등). 마찬가지로,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기나긴 식민주의의 역사와 얽혀 있다거나,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행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없는 현재의 노동·지정학적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p.123
해러웨이의 주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로, 그녀는 이 논쟁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이 교조주의라고 추론한다. 두 번째로, 그녀는 확고한 정치적 또는 윤리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교조적이라고 주장한다. 사냥을 하는 것 역시도 교조적일 수 있다고 표현되기는 하나, 해러웨이가 비거니즘은 먹는 행동이 지닌 윤리적 복잡성에 관한 성찰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것은 유독 통렬하다.
--- p.130
비판적 장애 연구 학자 수나우라 테일러(2017)는 - 어떤 형태의 생명체가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가에 관해 널리 퍼져 있는 장애차별적인 가정으로 인해 - 폭로와 유사한 함정에 빠지는 걸 방지하려면 고통에 초점을 맞출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폭로는 시스템보다 개인이 문제라고 비추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주장하듯이, 밀집된 생활환경 때문에 벌어지는 근친교배나 부상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고통을 더 길게 끌고 가지 않으려면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개별 동물을 죽이는 것이 훨씬 인도적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데에 활용될 수가 있다. 따라서 그녀는 이런 접근법은 어떤 종류의 생명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에 관해 오랫동안 이어져 온 편견을 강화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 p.177
동물을 애도할 만한 주체의 위치에 놓는 행동은, 그리고 동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폭력적이라는 새로운 틀에 넣는 것은, 동물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자로 만들며, 이들이 활동가들과 불화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무엇이 폭력적이라 여겨지는가라는 데서 생겨나는 긴장을 푸는 방법을 찾기란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인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맞설 수밖에 없는 문제다.
--- p.188
인간이 “예외적”이라 간주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는, 그리고 이런 예외론을 바탕으로 삼아 다른 종을 억압하면서 생겨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존재의 대사슬에서 낮은 단계에 놓인 것이 비단 동물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잭슨, 2016). 인종화 과정과 동물화animalization 과정의 관계(킴, 2015), 또는 자연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가부장적인 사회관계 사이의 연결은(애덤스, 2000; 라이트, 2015) 곧 특정한 사람들 역시도 역사적으로 -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 특정한 정치적·사회적 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배제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 p.210
이를테면, 고통받는 인간이 너무나 많은 와중에 다른 종에게 초점을 돌린다며 동물권 활동주의를 겨냥하는 비판을 피하려는 목적으로라든지, 또는 특정한 캠페인에 미디어가 관심을 갖게끔 만들기 위해서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아가, 아프 코는 공장식 농업과 인간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각자 역사적으로 고유한 억압들 사이의 차이점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데다, 이런 억압들이 공유하는 근원을 다루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p.222
비건 캠페인에서는 단순하고도 관심을 끄는 메시지와 단일 쟁점 정치로 빠지기가 너무나 쉽다. 이런 단일 쟁점 정치는 비건이 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인종, 계급, 젠더, 장애, 또 그 밖의 다른 요인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비건이 되는 것”만을 강조한다. 비거니즘에 관한 대중적인 묘사와 스테레오타입은 비건 실천을 개인주의적인 순수성 정치로 그려냄으로써 이와 같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 p.257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건이 된다는 것은 음식의 분배와 생산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을 다루고, 기후 정의를 향해 나아가며, 동물 착취에 맞서 싸우는 데에 보탬을 줄 수 있다. 이런 주장을 고수하는 사상가들이 보기에 지금의 난관은 바로 인간 착취와 동물 착취 사이의 연결점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가와 학자들의 과업은 비거니즘이 다른 사회적 쟁점들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광범위한 변화를 촉구하는 데 필요한 비거니즘이 더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p.265
마찬가지로, 비거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얘기될 수 있고 또 얘기되어야 하는 이야기들의 다원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비건 실천을 한데 뭉쳐 일축하는 것은 많은 경우-시스템 차원의 불평등, 특정한 형식의 활동주의와 관련된 문제, 또는 심지어는 학술적 영역으로서의 동물 연구 안에서 생겨나는 긴장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우호적인 비판을 단순히 비거니즘이 인간--- p.동물 관계를 재사유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 바라본다. 이런 서사는 위험하다. ... 비건 실천에 관한 우호적인 비판을 활용해서 비거니즘을 완전히 일축하는 일의 위험성은, 이렇게 일축함으로써 이런 작업이 열어젖힌 긴급하고, 구체적이고, 복잡한 질문들을 의도치 않게 열외로 취급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요한 개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과업을 고심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말이다.
--- p.307
이를테면 그린워싱 또는 비건워싱이 복잡해지는 까닭은, 비단 환경을 의식하는 새로운 소비자들을 (다시) 사로잡고자 생산라인에 부가적인 제품을 추가하는 패스트푸드 기업들과만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가격을 합리화하고자 저렴한 재료를 건강하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으로 브랜딩할 수 있는 제품으로 둔갑시키는 다소 다른 유행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대개는 “그린 프리미엄”이라고 설명한다).
--- p.338
내가 문화 연구 영역에서 이끌어낸 핵심적인 통찰 한 가지는, 이와 같이 복잡하고,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연결점을 실현하는 기회는 곧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스튜어트 홀이 주장하듯이, 대중문화란 필연적으로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장소다. 이는 특정한 이해와 정의를 지배적으로 만들고, 다른 것들은 지배당하도록 만들 수 있다.
---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