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Ⅰ부, “봉숭아”」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봉숭아〉는 1920년 4월에 작곡되었다. 난파는 작곡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 등에도 재능을 보여 『처녀의 혼』이라는 소설집을 발표했다. 그 첫머리에 ‘애수’라는 제목의, 바이올린 멜로디만으로 된 악보를 실었다. 그 악보 밑에 ‘1920년 4월 28일 작’이라고 분명히 밝혀 두었다. 기사와 함께 나온 것은 1925년 발행된 『세계명작곡집』이다. 〈봉숭아〉는 그의 처녀작이다.
---「Ⅰ부, “봉숭아”」중에서
〈봉숭아〉의 반주요형과 반주법
〈봉숭아〉의 가사 음률은 4·4조에 기초한다. 곡의 기사는 김형준이 애기했듯이 1910년 한일합방의 비운을 나타낸다. 1절과 2절에서는 낙화해 버린 봉숭아 신세처럼 나라 잃은 슬픔을 묘사하나 3절에서는 나라를 다시 찾기를 원하는 간절한 심정을 음유로 담고 있다. 그래서 이 가사들의 반주는 각 절마다 다르게 표현되어야 한다. 이런 반주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독일 작곡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의 1곡 〈방랑〉과 슈만의 『6개의 가곡과 레퀴엠』 Op.90의 1곡 〈대장장이의 노래〉가 있다. 전주 전주 없이 들어가는 이 곡을 성악가의 요청에 다라 전주를 만들어 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울밑에선’부터 ‘내 모양이’까지의 화성을 치고 마지막 ‘놀았도다’로 연결한다. 전주없이 원본대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Ⅰ부, “봉숭아”」중에서
시조의 시를 음미해야 할 반주
왼손 근음은 깊게 누르고 오르간 폐달처럼 울림이 깊어야 한다. 이런 묵직함과 울림은 마디마디 근음의 음이 달라지더라도 곡의 끝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이 근음이 곡을 지탱하는 빼대이기 때문이다. 오른손 4분의 3박자의 셋잇단음표는 그 근음 위에서 리듬을 일정하게 하여 부드럽게 부유하듯이 친다. 성악이 나올때는 오롯이 화성반주의 역할을 한다.
---「Ⅰ부, “옛 동산에 올라”」중에서
〈보리피리〉가 지어진 배경인 ‘나시인사건’
조념이 작곡한 〈보리피리〉는 연주회장보다 중앙방송국에서 먼저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고, 금주의 노래에 계속 뽑혀 2주간 방영되었다. 그러나 이곡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면 참으로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 발단은 1953년 10월 14일 ‘나시인사건’으로 그의 시「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에)」이 빌미가 되어 한하운을 문화적 빨치산으로 규정하여 음해한 것이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를 허구의 인물이라며 모함까지 했는데, 한하운이 산문시에 나타나 자기존재를 알리고자 즉석에서 써준 시가 바로 이 시다.
---「Ⅲ부, “보리피리”」중에서
템포 : 중모리장단 덩 쿵 따/ 쿵 따 기닥파 / 쿵 쿵 따 / 쿵 쿵 쿵 (12박)
조념은 김순남처럼 고유의 민족적인 얼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두었다. 『황토길』에 나오는 가곡들을 살펴보면, 토속적 선율과 서러움이 많이 묻어난다. 그는 곡의 속도를 메트로놈 박자 ??=120으로 제시했다. 이 속도를 우리 가락 리듬으로 전환하면 중모리 장단이 된다. 중모리 장단= 덩 쿵 따/쿵 따 기닥파/쿵 쿵 따/ 쿵 쿵 쿵(12박), 그리고 첫박과 아홉째 박에 강세가 있다. 모든 곡이 그렇지만 가곡의 가사 또한 어떤 템포인지에 따라 더욱 진정한 생명을 갖게 된다. 특히 우리 가곡은 순수 국악외에는 서양 기법으로 작곡되고 기보되므로 연주자들은 이곡이 어느 분야에 속하는지 엄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작곡가가 의도한 속도와 시인이 그러낸 형상이 잘 어울리는 진전한 빠르기를 연구하기를 권한다.
---「Ⅲ부, “보리피리”」중에서
고향의 행복함 속에서 탄생한 동요 같은 가곡 〈별〉
〈별〉은 이수인을 대표하는 가곡이다. 멜로디가 동요같아서 이 곡을 동요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술가곡이다. 이 곡이 생겨난 배경은 이렇다. 이수인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의령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마산의 회원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아서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즐겁게 지내던 이수인은 서라벌 예술대학(현재의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전신) 졸업 후 다시 마산으로 내려와 교직을 잡았다. 음악속의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자신의 고향은 마산이라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Ⅳ부, “별”」중에서
합창곡 스타일의 반주
성산동 댁에서 음악가들과 즐겁게 합창을 할 때, 이수인은 직접 반주를 했다. 가곡이 아닌 동요나 합창곡 스타일이었다. 밤하늘에 총총하게 빛나던 별을 보시고 지으셨으니 전주의 오른손은 별이 총 총 총 하게 빛나는 표현을 위하여 짧게 끊어서 쳐도 무방하겠지만, 이곡을 처음 작곡하셨을 때에는 예술가곡이라는 범주에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반주 형태가 나오게 된다. 1마디의 왼손 Eb은 맑게 ‘통~’소리가 나는 듯이 치는데, 셋째 손가락 손톱 아래의 도톰한 살로 부드럽게 건반을 미는 듯이 눌러준다. 작고 부드러우며 깨끗한 울림이 있는 예쁜 Eb 소리가 나야한다. 큰 별이 아니고 아기별처럼. 바로 받아 들어가는 오른손의 ‘G’음 소리는 절대로 강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그 G음이 첫 박처럼 들리게 되며 선율을 망치게 되니 극히 조심해야한다.
---「Ⅳ부, “별”」중에서
연주행위란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갈고 닦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 내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혜경선생은 반주자로서 음색의 다양함과 화성의 조화를 문학과 관련시킴으로써 한국가곡의 지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 깊이의 멋을 표출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심송학(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테너, 추천의 글)」중에서
우리 가곡은 오래된 미래다. 오래되었지만 그렇기에 우리 영혼에 더욱 깊이 뿌리박힌 이야기 자체다. 2024년 출간 예정인 『이야기가 있는 한국예술가곡 40, 가곡의 시간』에는 이번 책에 싣지 못한 주요 작곡가들의 곡과 우리 가곡에 희망을 줄 젊은 작곡가들의 곡이 담긴다. 우리 가곡 반주에 대한 정혜경 선생의 열정과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이 후속편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기를 바라며,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최영섭(작곡가, 추천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