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1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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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08쪽 | 486g | 130*205*25mm |
ISBN13 | 9791192107974 |
ISBN10 | 1192107977 |
발행일 | 2022년 1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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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08쪽 | 486g | 130*205*25mm |
ISBN13 | 9791192107974 |
ISBN10 | 1192107977 |
I 예언자와 고슴도치 1 망자들의 날 2 꽃의 힘 3 라일락과 나치 II 지하로 가기 1 연기, 셰일, 얼음, 진흙, 재 2 석탄기 3 어둠 속에서 III 빵과 장미 1 장미와 혁명 2 우리는 장미를 위해서도 싸운다 3 장미 예찬 4 버터 바른 토스트 5 어제의 마지막 장미 IV 스탈린의 레몬 1 수석 길 2 거짓말 제국 3 레몬에 대한 강압 V 후퇴와 공격 1 인클로저 2 젠틸리티 3 설탕, 양귀비, 티크 4 올드 블러시 5 악의 꽃 VI 장미의 값 1 아름다움이라는 문제 2 장미 공장에서 3 수정 같은 정신 4 장미의 추악함 5 눈과 먹물 VII 오웰강 1 즐거움의 목록 2 꽃과 열매 3 오웰강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도판 출처 찾아보기 |
아주 긴 여행을 한 기분이다. 실제로도 오래 읽었다. 2022년 12월에 떠나 2023년 1월에 마쳤으니. 현재의 물리적 시간은 그렇고 책 속에서 유령처럼 돌아다닌 시간은 수십 년을 오갔다. 20대 <1984>를 택시 안에서 읽던 시간과 30대 도서관에서 솔닛의 책을 처음 본 오후, 수많은 장면들이 회전하듯 빙글거렸다.
존경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라 가늠할 엄두는 못 내면서도, 예전의 이상화된 삶의 한 조각도 독자인 내게 남아 있지 않다는 쓸쓸하고도 안심이 되는 자각도 있었다. 오웰은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한 적이 없고, 솔닛은 이 책에서도 지적한 어리석고 애틋한 완벽의 추구... 상당히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은 철없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인간됨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 신의를 위해 기꺼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정다운 육체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금욕주의를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고, 결국에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를 하는 것”이라고
이상화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덜 폭력적이 된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모든 존재들은 제각각의 형태대로 아름답다. 그 화해는 몸의 긴장을 풀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자신의 선택이 어떤 내용과 방향이어야 하는지 평생 맑게 보는 시선을 가진 작가들이, 사상가가 있었다.
오웰이 장미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오웰의 변절과 정체停滯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비판의 언어가 장미 정원에 묻혀 소멸되었다고 여기는 이도 없을 것이다. 비판은 물론 장미도 묻어버린 것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저 많은 혐오와 폭력은 어디서 숨었다 터져 나오는 것인지 어딘가에서 대량생산 중인 것인지.
“전제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나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즉 경험의 현실성), 진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즉 사유의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파탄에 이른 정신 상태, 내 정신 상태에 들락거리는 것들...
지적 굴복, 믿기 편리한 모든 것을 기꺼이 믿으려는 주눅 든 순응성, 때로는 냉소주의,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는 태도,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썩었다는 단언...
별 일 없이 사는 듯해도 매일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그러듯이 다른 이들도 살기 위해 귀를 막아 보기도 하고 눈을 돌려 보기도 하고 어딘가로 도망을 가서 숨을 고르기도 한다. 그 자구책들이 모두 성공해도 어딘가에 상흔이 남는다. 때론 날카롭게 밖을 향해 무작위로 누군가를 공격하기도 한다.
내가 품은 기대와 희망이 서늘한 만큼 세상의 온기도 식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 장미의 꽃들이 피려다가 병들고 시들어버릴 기온일지도... 상상 속에서도 서글픈 풍경이다. 솔닛이 찾아간 오웰은 따뜻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장미를 심고 가꾸었다. 아름다운 조우였다.
“빵과 장미”라니 (...) 거기에는 생존과 신체적 복지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또 권리로서 요구된다는 맹렬한 주장이 들어 있다. (...) 장미란 인간이라는 존재가 복잡하고 욕망들은 환원 불가능하며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종종 훨씬 더 섬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오웰 때문도 아니었고 장미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의 홍보 문구에 꽂혔다.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책을 읽기 직전, 나는 갈수록 우경화되는 사회에, 기후 위기가 실현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경제 침체의 그림자에, 심해지는 빈곤과 불평에 슬퍼하고 있었다. 이 우울함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쁨의 저항으로 말이다. 오웰과 장미는 그저 내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내가 책에서 알아내고 싶은 건, 오웰도 장미도 아니고 기쁨으로 저항하는 방법이었을 뿐이니까.
읽고나서 더 알쏭달쏭해지는 책이다. 이 책은 무엇에 관한 책일까? 오웰인가? 장미인가?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인가? 헷갈린다. 책은 어떤 장에서는 오웰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오웰이 자기 정원에 심은 장미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다가 어느 장에서는 장미와 관련된 (그러나 오웰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다른 장에서는 오웰도, 장미도 언급하지 않고 스탈린 체제와 전체주의에 대한 묘사만 나온다. 이 책은 무슨 책일까?
오웰은 사회를 분석하는 작품들을 많이 썼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쓰는 작품들은 대부분 어둡고 침울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운다>를 쓰고 나서 근 1년 넘게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작가는 자기가 쓰는 작품과 동떨어진 삶을 살지 못한다. 사회비판적인 책을 많이 쓴 오웰은 우울, 비탄과 같은 감정들에 빠져 살지 않았을까?
오웰은 그러지 않았다. 오웰은 그러는 대신에 자기 정원에 장미며, 과실나무를 심었다. 그것들을 아주 정성스럽게 가꿨다. 정원 가꾸기는 오웰에게 시대와 상관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 나도 나의 장미를 심어야겠다.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이 1936년 4월부터 몇 해 지냈던 런던 근교 월링턴의 옛집을 찾아갔다. 오웰의 정원에 심었다는 사과나무(문득 스피노자가 생각난다)가 아직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과나무는 뒤뜰의 창고를 확장하면서 베어버려 없었다. 그런데 오웰이 심은 장미는 아직 그대로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다시 정원으로 나갔고, 그곳에는 그 11월의 날에도 멋대로 자란 커다란 장미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그루에는 연분홍 꽃봉오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다른 한 그루에는 거의 새먼핑크 빛깔의 꽃이 피었는데, 꽃잎들의 밑동은 금빛이었다.” (25쪽)
이 책은 솔닛이 오웰이 살던 집에서 발견한 장미에서 비롯되었다. 한 작가가 의도치 않게 남겨 놓은 보잘 것 없는 식물을 통해 그녀는 그의 삶과 세상에서 차지한 위치, 세상과 맺은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오웰은 장미 이야기를 여러 에세이에 남겼다. 솔닛이 오래전에 읽었던 <브레이 본당신부를 위한 한마디>에 바로 장미를 심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좌파 잡지에 게재된 그 에세이를 두고 어떤 독자는 장미를 두고 ‘부르주아적’이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솔닛은 여기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과연 그런가?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오웰이 장미를 심고, 장미 이야기를 자주 한 것이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장미는 오웰에게, 아니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의미한다. 과연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이상을 좇는 것과 상반되는 일인가? 오웰이 그랬듯이 솔닛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솔닛은 오웰을 다시 읽었다. 그가 남긴 소설뿐 아니라 많은 에세이, 그리고 가사 읽기들이 모두 오웰이 어떤 이였는지를 보여준다. 오웰이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무엇을 역겨워하고, 무엇을 지향했는지가 그의 글들에 있었다. 솔닛은 오웰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고 있지만, 이 책은 결코 오웰의 평전이 아니다. 오웰에 관해 많이 쓰고는 있지만 결국은 오웰을 중심에 두고 종횡무진 다른 이야기들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장미’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장미는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고, 현대의 기후 위기를 가져온 석탄이 된 식물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빵과 장미’라는 구호를 통해 진보의 상징이 된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장미를 찍은 사진작가가 다시 사진과 장미를 버려야 했던 현실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깊게 편입된 장미 산업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되기도 하고, 소련의 그릇된 유전학, 리센코주의와 스탈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오웰과 장미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최근에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를 읽었다. 물론 그것을 읽었을 때의 나의 감상도 있지만, 솔닛은 오웰의 글을 매우 섬세하게 읽고 있다. 특히 『1984』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내가 죽고 상심했던 그가 결핵으로 망가진 몸으로(아마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써간 그 작품은 단순히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만 하기에는 참 많은 것을 담은 작품이라는 걸 솔닛을 통해 다시 알게 된다. 이게 과도한 몰입 같아 보이지만, 이상에 헌신하고, 자신 편의 잘못에 기꺼이 비판의 펜을 들고, 병들어가는 시대를 함께 아파한 한 작가에 몰입하는 것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솔닛을 통해 오웰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솔닛의 책을 잔뜩 쌓아두었다가 결국 읽지 못하고 도로 물린 적이 있다. 내 책상에 올린 책을 그렇게 물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땐 그랬다. 그래서 이 책이 솔닛의 책으로는 첫 번째다.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를 좀 알 것 같다.
오랫동안 결핵을 앓았던 조지 오웰은 1950년 1월 21일 죽었다. 그는 자기 무덤에 장미를 심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오웰의 무덤을 찾은 듯한 솔닉의 말에 의하면 “허접스런 붉은 장미 한 송이가 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