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현재진행형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만끽하면서...'
--- 00/2/21 이상구(flypaper@yes24.com)
농담말로 이제 '헐리우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상력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거만하고 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기분나쁜 자만심이지만, 헐리우드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눈여겨 보면 아찔한 현실감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SF작가 필립 K.딕이 1966년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는 30여년이 지나 '토탈리콜'이란 명칭으로 영화화 된다. 상상력을 따라 가지 못했던 기술이 뒤늦게 영화라는 또 하나의 상상력을 맞아 들여 현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필립 K.딕의 상상력이 단지 영화라는 또 하나의 상상력을 맞아들였을 뿐 현실에서는 여전히 요원한 몽상인 반면,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보여준 스탠리 큐브릭의 상상력은 더욱 더 놀라울 수 밖에 없다. 가상의 시공간에 설정한 상상력이 몇년 되지 않은 근미래에 현실로 직접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달착륙이 그랬고, 스페이스 셔틀이 그랬고, 컴퓨터에 대한 무한한 확장 가능성의 예견이 그랬다.
<21세기를 지배하는 키워드> 역시 상상력으로 미래 문명의 확장 가능성에 접근한다. 하지만 일견 언급된 걸출한 인물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즉 상상력 그 자체로만 승부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었던 필립 K.딕이나 스탠리 큐브릭과는 달리, 저자는 과학문화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인물, 즉 과학을 마냥 상상력으로만 점유할 수 없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채 21세기를 예측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저자는 키워드(핵심개념)이라는 제3의 개념를 도입하여 성공적으로 극복한다. 21세기 1백년 간에 대한 시나리오를 단순히 상상력이라는 매체만으로는 도출할 수 없는 법. 해서 '의미와 파급효과'적인 측면에서 21세기 인류사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 높은 '키워드 80개'와 '21가지 아이디어'를 선정한 후, 아이디어 수준에 머무를 위험이 있는 101가지 상상력에 저자 자신의 노하우인 '과학'이라는 무기를 쥐어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홀로 가는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한 저자의 과학적 상상력 속에는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에 반응하는 정서반응 컴퓨터', '네오기관의 일상적 대체' 등 유토피아적인 의견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의 끔찍한 악몽을 안고 가야 하는 맞춤아기', '성비파괴로 맞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아살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하는 기계의 등장' 등의 디스토피아적인 우울한 생각 역시 가득하다.
대부분의 글은 <주간동아>에 92년 한해 동안 연재되었던 '이인식의 21세기 키워드 칼럼'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가나다 순으로 재배열한 것이며, 단 하나의 유일한 예외는 1000년 뒤에 해당되므로 80번째에 수록된 '31세기' 뿐이다.
너무도 어리둥절하게, 한편으론 무덤덤하면서도 냉소적으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새천년의 의미를 한권의 책을 통해 조목 조목 더듬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듯 하다. 그렇게 더듬어 가는 미래가 바로 현재 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가득 만끽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