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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리뷰 총점9.6 리뷰 8건 | 판매지수 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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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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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0쪽 | 290g | 128*188*15mm
ISBN13 9791191861167
ISBN10 11918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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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아니 에르노의 기억 속 마지막 퍼즐]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가 2016년에 발표한 작품. 소설가 백수린이 번역했고, 에르노가 써야만 했던 ‘1958년 어느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타의로 자기가 상실되는 경험을 해봤다면,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잃었던 자신의 퍼즐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 소설 PD 이나영

저자 소개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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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일기 속 문장들엔 ‘S의 여자아이’나 ‘1958년 여자아이’에 대한 암시들이 있었다. 20년 동안, 나는 책을 쓰려는 내 계획 속에 ‘58’이라는 숫자를 적는다. 그건 여전히 쓰지 못한 책이다. 언제나 뒤로 미뤄진.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구멍.

2022년 노벨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2016년 작품, 『여자아이 기억』이 소설가 백수린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1958년 열여덟 살의 여름에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이 불러온 파장들을 작가는 끈질기게 추적한다. 1958년에서 1960년까지 2년의 시간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일기에서 언급할 정도로 이 사건은 작가로서의 아니 에르노의 삶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1958년 여름, 열여덟 살 여자아이는 처음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떠나 자유를 맛본다. 방학캠프의 지도강사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부모님의 감시망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갑자기 어른이 된 듯 잡지와 소설 속에서만 접한 사랑을 꿈꾸던 여자아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H라는 대표 지도강사와 밤을 보낸다. (H로 시작하는 남성의 이름이 몇 있지만, H가 프랑스어로 남성을 의미하는 homme의 머리글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날 이후 여자아이는 그와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라 믿으며 그날의 사건을 합리화하지만, 그럴수록 H를 비롯한 동료 강사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한다. 그들은 성별을 막론하고 그 여자아이를 대상화하며 ‘창녀’라고 부르고 ‘그래도 되는 아이’라고 여기며 희롱한다. 여자아이는 영문을 알지 못한다. 집안과 학교의 자랑거리였던 그녀는 왜 하루아침에 세상의 멸시를 받게 된 것일까.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느낀, 부모와 계급에 대한 ‘1952년의 수치심’을 1997년 작품 『부끄러움』에서 이야기했다. 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떨칠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반면, 타인에 의해 각인된, ‘1958년의 수치심’으로 일기장에 명명했으며 끊임없이 되새겼던 그날의 이야기는 우회하는 방식으로 이전 책들 속에 살짝 언급하거나 회피해왔다. (앨범 속 사진을 꺼내 지난 삶을 반추한 『세월』에서도 작가는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암시로 언급할 뿐이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불법 임신중절 시술에 대해서는 데뷔작인 『빈 옷장』의 첫 페이지부터, 그리고 2000년 『사건』에서 자기연민 없는 정확한 언어로 기술한 작가이지만, ‘1958년의 수치심’에 대해서는 글쓰기 계획에 줄곧 언급되어 있었음에도, 20년 동안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기를, 그녀와 그녀의 욕망과 광기, 그녀의 어리석음과 오만, 그녀의 허기와 말라버린 피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본문에서)

“엄청난 영광이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잊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여자아이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떨쳐버리려고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마침내 그날의 기억에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여자아이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인 자신이 그 이야기를 쓰지 않고 죽을 수 없다’는 작가로서의 결연한 의지였다. 당시 유력한 프랑스 대선 주자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와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같은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들이 이 글을 끝맺게 한 또 다른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 일지인 『아틀리에 누아』에서 밝힌 바 있다.

아니 에르노는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 이후 인터뷰에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말로 첫 소감을 말했다. 자신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다는 비장함으로 작가는 ‘1958년 여자아이’이자 어쩌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숨어 있을 수치스러운 과거를 조명한다. 옮긴이 백수린이 말했듯, 작가가 ‘그녀’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해 글을 쓰는 현재의 ‘나’와 만남을 시도하는 것처럼 독자 역시 그 여자아이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어쩌면 기억 속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받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안전하고 완벽한 자족의 세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타자와 대면하고, 이해할 수 없으나 내게 강요된 타자의 법칙 앞에 압도되어 자신을 상실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옮긴이의 말에서)

회원리뷰 (8건) 리뷰 총점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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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주간우수작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50년 전 나와의 조우 [여자아이 기억]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생* | 2023.03.13 | 추천24 | 댓글28 리뷰제목
(독서후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50년 전 나와의 조우 <여자아이 기억>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기를. 그녀와 그녀의 욕망과 광기, 그녀의 어리석음과 오만, 그녀의 허기와 말라버린 피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리뷰제목

(독서후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50년 전 나와의 조우 여자아이 기억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기를. 그녀와 그녀의 욕망과 광기, 그녀의 어리석음과 오만, 그녀의 허기와 말라버린 피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16)

 

끝내 그러지 못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오히려 더 자세하게, 꼼꼼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복원하면서, 리마스터링하고 디지털화하여 1958년의 그녀를 소환시켰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AI를 결합하고, VR로 죽어버린 자녀를 만나는 홀로그램 장치처럼, 완벽하게 그리고 괴롭게 그녀는 자신의 잊고 싶은 자신을 끔찍하게 만나고 기록한다.

 

나는 매일, 빠르게, 내가 쓰는 날짜를 1958년의 날짜와 정확히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글을 이어갔다.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디테일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중단되지 않는, 매일 매일의 기념일을 챙기는 방식의 글쓰기가 45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무너뜨리는 데 가장 적합한 것처럼 느껴졌다. (17)

 

그녀는 1958, 잊을 수 없는 H와의 만남의 기억이, 50년의 세월에도 무색하게 불쑥 나타나 또 다른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다시 무너지고, 1958년의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

 

“1958년의 그 여자아이는 그러니까 내 안에 숨은 채 확고부동하게 존재하고 있다. ... 그 여자아이는 내가 아니지만 내 안에서 실재다. 일종의 실재하는 현존.” (24)

 

그녀는 기억 속의 여자아이가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회피하지만 여전히 세월을 뛰어넘어 실재하는 현존임을 깨닫는다. 무섭다. 그러니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써야 했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블록쌓기처럼 배열해야 했다. 그것이 결국 50년 전의 여자아이가 지금의 늙은 작가와 합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이런 장르를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까, 주인공과 작가가 책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아이러니한 비극을. 저자는 3인칭 시점도 아니고, 소설 속 화자가 되어 자신의 소설쓰기를 함께 버무린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손을 그리는 바로 그런 작품처럼.

 

글을 써나갈수록, 내 기억 속 이야기가 지금까지 지녀온 단순함이 사라진다. ... 의심 : 나는 내 글쓰기의 한계를 실험하고 글쓰기가 현실에 가능한 한 가까이 밀착할 수 있또록 밀어붙이기 위해 내 인생에서 이 순간을 펼쳐보이길 은연중에 원했던 건 아니었을까.” (74)

 

1958년 여름방학 캠프에서 H와 하룻밤을 보내고, 여자아이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 된다. H만을 갈구하면서, 여러 남자와 계속해서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 H는 여자아이의 인생에 50년이 지나서까지 그를 생각하고, 그 일을 잊지 못하게 하는 파괴적인 기억을 남겼는데, 정작 H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그 부부는 1960년대에 결혼했고, 그들에겐 많은 자녀와 손주들, 증손주까지 있다고 한다. 남자의 인생.

...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는데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131)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여전히 40년이 지나서도 여자이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씀으로써 오히려 더 확고하게, 50년 전의 여자아이의 기억을 미라처럼 만들어 놓는 것.

그래서 여자아이가 50년이 지난 뒤, 지금의 자신으로 환생하듯 완벽하게 복원되는 것.

 

매우 작고 얇아, 문고책 같아, 한 손에 쥐고 후르륵 면치기하듯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앙증맞은 책.

 

그러나 책 속에는 1958년부터 지금까지 기억의 더께가 의식의 흐름과 세월의 왜곡과 의지의 거부와 켜켜이 엎어지고 얽히고 꼬이고 쌓여있어,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결연한 의지로 끝내 이 책을 다 완성한 것처럼, 독자인 나도 결연하게 글쓰는 그녀와 1958년의 그녀를 동시에 읽어낸다. 그 호흡을 따라간다.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958년의 여자아이는 욕망, 광기, 어리석음, 오만, 허기였을까.

아니면, 사랑, 사랑,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래서 50년 전, 40년 전의 남자아이를 떠올린다.

결국 그때의 나를 만나지 않고서 내 인생을 완성시킬 수 없다면,

나 역시 1980년의 남자아이를 만나러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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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l*e | 2023.01.08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지금 읽은 것이 꽤나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과거의 사건, 시기가 현재의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책은 현재에서 시작해 1958년을 관통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책에서 표현하는 전현재가 나의 현재처럼 느껴진다. 그 전현재가 확장되어 글을 쓰는 작가에서 닿는 순간들이 나의 미래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작가의 19;
리뷰제목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지금 읽은 것이 꽤나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과거의 사건, 시기가 현재의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책은 현재에서 시작해 1958년을 관통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책에서 표현하는 전현재가 나의 현재처럼 느껴진다. 그 전현재가 확장되어 글을 쓰는 작가에서 닿는 순간들이 나의 미래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작가의 1958년과 나의 2022년은 다르다. 책은 여자아이가 노년의 작가로, 대상이 주체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책의 인물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려면 내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어야한다. 나는 내가 주체로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동일시하기엔 껄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전현재가 나의 현재처럼 느껴진 것은 여전히 불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체라고 하는 나의 선택이 과연 나의 선택인지, 나의 생각이 과연 나의 선택인지에 대한 불안.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작가가 1958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끊임없이 분열과 사멸을 반복해서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나를 구성하던 물질은 남지 않는다. 존재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물질보단 다른 부분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책에서 비물질적인 부분에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생각도 사상도 감정도 바뀌어가고 덧칠되어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 정말 정교해서 놀라웠다. 북토크에서 해부한다는 표현을 썼는데(요즘 2학기 때 있을 수업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서 그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그보다 더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는 부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가 선택한 직업에 대해 그만큼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직업이 아니라 내가 하는 어떤 일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느끼는 확신을 쫓아가지 못할 것 같아 약간 두려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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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심장을 파고드는 작고 붉은 책 한 권의 힘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e****n | 2023.01.07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기억한다,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를. 싫어한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열여덟 살이라는 걸. 지방 소도시 특유의 문화 속을 걷는다는 사실을. 혐오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아도 여자아이가 경험하는 감정은 그 단어를 닮았다.버스를 타는 일은 고되다. 등하굣길 언덕 높은 곳으로 오르는 만원버스 안. 높은 습도, 더부룩한 냄새,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이 가득 끼어 있는 사람들. 여자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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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를. 싫어한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열여덟 살이라는 걸. 지방 소도시 특유의 문화 속을 걷는다는 사실을. 혐오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아도 여자아이가 경험하는 감정은 그 단어를 닮았다.

버스를 타는 일은 고되다. 등하굣길 언덕 높은 곳으로 오르는 만원버스 안. 높은 습도, 더부룩한 냄새,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이 가득 끼어 있는 사람들. 여자아이는 밤늦게 수업과 야간 자습을 마친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여자아이가 살던 주택가로 내려가기까지 이어지는 몇 블록의 번화한 길. 술집이 빼곡히 들어선 거리, 번쩍이는 네온 간판들, 삐걱삐걱 비틀거리는 어른들이 불콰한 눈길로 여자아이를 쳐다본다.

여자아이는 마치 교복이 무기라도 된다는 듯, 가방 어깨끈을 꼭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며 속도를 내어 힘차게 걸어내려간다. 일부러 걸어와 부딪치며 신체 어딘가를 스치거나 아프게 치고 가는 미친 어른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얼어붙은 여자’ 이후 1년 여만에 다시 마주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은 계속 어떤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주체가 되고자 했으나 주체가 되지 못했던 기억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어떤 순간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 기억들은 잘라낸 단면이기도 하고, 잊고 있던 장면 너머를 새롭게 이어가기도 하며 고스란히 되살아나 삐죽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상하게 자꾸 떠오르는 장면 하나. 노래방에 간 여자아이를 본다. “예쁘지 않아 나를 떠나간 거니”라는 노래가사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또 한 명의 여자아이와 고등학교 연극반 선배의 옆모습을 관찰하는 여자아이. 언니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소외의 순간들을 경험하며 잘못 없음을 항변하기보다 외형적으로, 내면적으로 달라지고 싶어하는 감정과 필사의 노력을 지속하던 어느 시간들. 현격히 기울어진 관계에서 객체화되고 공개적으로 버림받고 놀림거리로 전락하면서도 자기검열에 빠지는 어떤 자세들. 지금에야 그런 객체화된 감정과 자기검열이 관계와 사랑과 성장 서사에서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때 그 시간을 살던 여자아이들은.

1958부터 1960까지. 시대보다 중요한 건 시간일까. 붉은 표지의 수첩에 적히던 일면 불가해하고 불투명하게 얼룩진 서사의 그늘이 자기연민의 언어가 아닌, 냉정하면서도 불길처럼 뜨거운 객관화의 시선으로 쓰여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얼음처럼 불타게 한다. 깊은 심연의 바다 밑에서 홀로 빛나며 불타오르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의 존재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 _ p.127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 모든 문장, 모든 단언에 구멍을 뚫어야만 하는 현재의 불투명함.” _ p.161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_ p.211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_ p.131

) 한참 시간이 흘러간 이후에도 결코 지워내거나 비워낼 수 없던 기억의 편린들을 멀찍이 관조하는 시선으로 담담하고도 날카롭게 적어내는 노작가의 손길을 생각한다. 또한 이를 정성껏 풀어내는 젊은 한국인 번역가이자 소설가의 손길을 동시에 느낀다. 독자 입장에서 마치 작가와 번역가가 부지런히 협업하며 마음을 담아낸 것 같은 한 권의 책을 만나는 일은 ‘살아있음’을 사랑하게 만드는 기쁨이다.

책에 담긴 관찰자적 자아의 시선과 손길이 생생하고 아프게 독자의 심장을 파고드는 작고 붉은 책 한 권. 잊었다고 여겼던 혹은 사무치게 잊고 싶었던, 결코 잊지 못하고 박혀 있던 어느 순간의 서사들이 또 다른 독자들의 심장에도 깊게 스며들어 뜨겁게 흘러내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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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7건) 한줄평 총점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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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믿고 읽는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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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키* | 2023.03.27
구매 평점5점
너무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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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로얄 룰* | 2023.02.09
구매 평점5점
글, 경험, 기억, 현실성과 비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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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n*******8 |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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