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는 찰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 수현의 고유한 암살 방식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그것을 ‘시그니처 (signature) ’라고 불렀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를 ‘자비의 사신’이라고 이름하였다.
18세기 독일의 사형 집행인들은 자비에 가까운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한다. 거열형 순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형이 집행되기 직전 목을 졸라 미리 죽이기도 했고, 화형을 선고받은 자들이 최대한 빠르게 질식할 수 있도록 장작더미에 황을 넣어두기도 했다. 사형수들에게 짧은 고통과 편안한 죽음을 주기 위한 나름의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의 가상한 노력에도, 어쨌든 세상은 그들을 살인자로 기억할 것이다. 여전히 그들을 괴물이라 손가락질하고, 죽음을 가지고 오는 불길한 존재라고 멸시할 것이다. 사형 집행인들 역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그런 가상한 노력을 했던 것은 물론 아닐 것이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그 역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비의 사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수현이 이 더럽고 끔찍한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명의 목숨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고백하건대, 단 한 번도 사람을 쉽게 죽여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주사기를 들고 있는 오른손이 벌벌 떨려, 한 번쯤은 깊은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드럼통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니 드럼통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살려달라 애원하던 목소리와 마지막으로 몸이 한 번 부르르 떨릴 때의 감촉까지 생생하게.
---「1. 자비의 사신」중에서
희주는 공방이 늘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빈 공방에도 라디오를 켜놓거나 향초를 피워놓았다. 아름다운 음들이나 향이 공방을 채우면 이곳이 폭신해진 느낌이 들었 다. 오래된 한옥의 헛간을 개조한 고즈넉한 공방이었다. 서쪽으로 난커다란 통유리 창문에는 늦은 오후가 되면 숨을 곳이 없을 만큼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창문 가장자리로는 담쟁이들이 하나둘씩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창문 안쪽 조그만 선반에는 산세베리아나 트리안과 같은 화분들이 아기자기 놓여 있고, 아래에는 미술 화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희주는 물감이 묻어 있는 미술용 앞치마를 그대로 입은 채 공방 구석 조그마한 간이 부엌으로 향했다. 차를 한잔 마시려고 물을 끓일 참이었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메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공방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희주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를 한 남자가 공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있는데도 그 속의 날렵하고 훤칠한 체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당신이 강희주 씨입니까?”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었다. 겉으로는 예의를 지키는듯 행동하지만, 몹시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투와 몸짓이었다. 희주는 대답 대신 경계의 눈빛으로 응답했다. 이 사람은 그동안 만나본 수많은 사람과는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을까?’ 남자는 천천히 공방을 둘러보았다. 그냥 공방을 둘러볼 뿐인데도, 그의 모든 행동이 희주를 위압하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있는 내담자들의 그림을 집어 들고 찬찬히 훑었다. 군데군데 희주의 진단과 소견이 빼곡하게 적힌 포스트잇 노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거 보시면 안 되는데요.”
희주는 조심스럽게 그의 거침없는 무례를 제지했다. 그는 희주에게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그림을 테이블 위에 다시 놓아두었다.
“의사가 보내서 왔습니다.”
그제야 희주의 눈에서 경계의 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종종 환자들 에게 희주를 연결해주는 의사들이 있었다.
“아……, 미술치료 상담받으러 오신 거군요. 그럼 전화로 먼저 상담 시간을 정하고……” 희주가 말을 하고 있는 중간에 남자가 말을 잘랐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그리면, 그걸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있다는 겁니까?”
희주는 처음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의도적으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겁이 났지만, 한편으 로는 오기가 생겼다. 희주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네.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거짓 없이 진심으로 그리신다는 전제하에요.”
“그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섯 가지만 알아맞혀 보겠습니까? 치료를 받기 전에 강희주 씨의 실력을 먼저 알아보고 싶군요.”
---「2. 메두사를 닮은 남자」중에서
“어……, 일단 음……, 설명을 조금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떨려서 나왔다. 희주는 목소리를 가다 듬고 다시 말했다.
“여긴 미술치료실이지, 타로점이나 사주를 보는 곳이 아닙니다. 그림만 보고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알 방법은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 대신 그림을 그리고 나서 제가 그 그림에 대한 질문을몇 가지 드리면, 그때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저와 나누는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질 겁니다.”
희주는 수현의 반응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거부감이나 저항은 없는 것 같았다.
“미술치료는…… 미술 수업과는 조금 달라서, 잘 그린다, 못 그린다 같은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정해진 답도 없고…… 그냥 편하게 그리시면 됩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수현이 어색한 움직임으로 하얀 도화지를 한번 쓸어내렸다.
“집, 그리고 사람과 나무를 그려볼 건데, 최대한 자세히, 구체적으로 그려주셔야 해요. 예를 들면 그림 속의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그런 것까지도 자세히 그려주시는 게 좋습니다. 시간제한은 없으 니까 자유롭게 그리시면 됩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집-나무-사람 (House-Tree-Person) 검사’ 즉, ‘H-T-P 검사’는 누구에 게나 친숙한 사물들을 그리게 함으로써 내담자들이 그들의 성격과 정서를 무의식으로 표현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직관적으로 내담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미술치료사들이 상담 세션에서 이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게다가 이 세 가지 사물들 자체로도 풍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 내담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 때문에 미술치료 사들 사이에서 꽤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희주는 잠깐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수현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앞에 놓인 하얀색 도화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원래 하는 대로, 수현의 반대편 자리에 가서 앉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이 사람은 그녀가 바로 앞에 앉아 있으면 절대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담자 중에서 이렇게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그럴 땐 무조건 자리를 비켜주고, 내담자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희주는 수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있기 전에, 차를 마시려고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커피 포트는 자동 으로 꺼져 있었지만 물은 아직 뜨거웠다. 희주는 엄마의 정원에서 직접 재배하고 말린 라벤더 찻잎으로 차를 우려냈다. 수현의 것까지 찻잔을 두 개 꺼내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 내담자들과 늘 차를 함께 마시면서 친밀감과 유대감을 먼저 형성하는 그녀였지만,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내담자에게는 왠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가득 차 있는 남자였다. 그와 오래 시간을 함께 보내면 그 불길함이 그녀에게 전염될 것만 같아 불쾌 했다.
---「3. 집과 나무와 사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