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에서 일상은 보냄 받은 곳이자 일터요, 사명의 공간이다. 《새로운 일상신학이 온다》는 오랫동안 일상생활 사역을 펼쳐온 지성근 목사의 사역 보고라 할 만하다. 저자는 전문적인 용어를 거의 동원하지 않고 매우 쉽게, 그야말로 대화를 나누듯이 일상의 의미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일상생활 신학을 삼위일체 신학에 기초해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 방식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와 활동 방식, 나아가 교회의 존재와 활동 방식을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 가운데 거하며, 삼위 하나님이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이미 영생을 누리기 시작했다. 일상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이 점을 잘 드러낸 것은 소중한 기여일 것이다.
---「“서문: 사명의 공간, 일상을 새롭게”」중에서
“뿌리 깊은 영육이원론과,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한국 교회의 영성과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공간적으로는 교회당을, 시간적으로는 주일을 중심으로 신앙생활과 사역이 이루어진다. 교회당과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대한 헌신이 주되심의 전부인 양 강조될 때, 교회당 바깥에서의 삶과 ‘나머지 6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모든 공간, 모든 시간에서 주님이셔야 한다. 이것이 일상생활을 사역으로, 예배로, 섬김으로 이해해야 할 신학적인 당위다.”
---「“1장. 관점 | 일상신학 생활신앙의 패러다임 전환”」중에서
복음과 구원을 좁게 이해하면 이 세상으로 나가는 일은 위험하거나 부질없는 짓이 됩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일상다반사를 억제하고 영혼을 깨끗이 하여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 부단히 훈련하며 그때를 기다리는 교회 모임(ecclesia)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런 작은 복음, 작은 구원관을 가진 이들은 사람들에게 자꾸 모이라고 강조합니다. 모임의 횟수와 모이는 이들의 숫자로 신앙의 건강성, 교회의 활기를 가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범위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면 단지 모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임의 목적이 오히려 세상으로 흩어지는 데 있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여서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는지를 말씀과 교제로 재확인하고, 함께 피조 세계, 곧 세상으로 흩어져서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드러내는 비전을 성취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모임의 존재 이유는 언제나 세상으로 흩어지는 것(diaspora)에 있어야 합니다.
---「“3장. 복음과 구원 | 일상을 위한 복음”」중에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세상’의 용례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고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곳이 ‘세상’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중성 때문에 오해가 많이 생깁니다. ‘육신적’ ‘세상적’이 되는 것은 금하지만 ‘육신’과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긍정하고 사랑하시는 것으로 이 이중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중성에 대한 이런 이해가 없으면 몸과 세상을 무조건 긍정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부정합니다. 또 이 이중성을 거꾸로 이해하면 ‘육신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은 긍정하고 사랑하면서, 오히려 ‘육신’과 ‘세상’은 금하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금욕주의를 택하거나 정반대로 혼합주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태도, 즉 몸과 세상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것과 몸과 세상에 탐닉하여 사는 것이 사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토록 놀라운 복음을 갖고도 세상에서 일상을 즐겁게 살지 못하는 이유이며, 또한 복음과 구원을 그토록 작고 좁게 이해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4장. 신학 | 거짓 가르침과 일상생활의 신학”」중에서
올바른 관계를 성경은 ‘의’(義)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한 개인의 덕성이나 법적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관계가 올바를 때 그것을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 자아와의 올바른 관계, 일과의 올바른 관계, 생태계와의 올바른 관계 같은 모든 관계를 통해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자기 자신, 주변 사람, 일, 정사와 권세, 동식물과 생태계 등 이 모든 것과의 관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올바른 관계 즉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 전반에서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충만’(성령 충만, 말씀 충만, 생명 충만 등)은 이렇게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5장. 영성 | 삼위일체 신앙과 일상생활의 제자도”」중에서
지금까지 교회는 공간적으로 예배당 안에, 시간적으로 주일과 모임 시간 안에 신앙을 가두어두고, 예배란 예배당에서 모이는 시간에 하는 절대적이고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라고 은연중에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신앙 행태를 마치 경건함과 거룩함의 대명사인 것처럼 여기고, 일상의 자리인 일터와 가정, 이웃과 세상을 은근히 거북한 곳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상황을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않고 대한다면 그것 자체로 이미 크게 병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확인하고, 일상을 보냄 받은 파송의 자리로 인식하고 경축하도록 성도들을 구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의식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교회 내부를 위한 프로그램과 결속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회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이 이야기하는 온전한 복음을 차근차근 가르치고 배우며,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6장. 교회 | 일상 교회, 미션얼 교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