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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뷰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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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418g | 128*188*20mm
ISBN13 9788925577081
ISBN10 8925577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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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는 계단 아래 제일 어두운 곳으로 유아차를 밀고 가, 유아차 아래 손을 넣어 크고 평범한 봉투를 꺼내 스튜어트 앞에 섰다. 스튜어트의 애매한 미소를 보니 문득 기숙학교 생각이 났다.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늙은 신부. 릴리는 그 학교도 신부도 싫어했다. 그래서 스튜어트도 싫어하기로 했다.
“다 읽을 때까지 여기 앉아 기다릴게요.” 릴리가 말했다.
“오, 그래요.” 스튜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경 너머 릴리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뭘 기다리시게?”
“답신이 있으면 구두로라도 엄마한테 전해야 해요. 전화나 문자, 이메일을 싫어하시거든요. 첩보국이든 프록터 씨든,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그것도 유감이로군.” 스튜어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제야 손에 든 봉투를 깨닫기라도 한 듯 깡마른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대단하군. 편지가 몇 장이나 될 것 같소?” “저도 몰라요.”
“가정용 문구인가? 아냐, 아냐, 가정용이 이렇게 클 리가 없잖아. 그냥 평범한 타자지겠어.” 그가 다시 찔러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내용물은 못 봤어요. 말씀드린 대로.”
“아, 물론, 그렇게 말씀하셨지. 에…….” 그의 코믹한 미소에 릴리도 잠시 긴장을 놓고 말았다. “아무튼 일은 해야겠지? 다 읽으려면 시간이 좀 길어질 듯싶은데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소?”
현관 맞은편에 있는 썰렁한 응접실. 릴리와 마리는 흉측한 격자무늬 팔걸이의자에 마주 앉았다. 조악한 유리테이블 위에 놓인 양철쟁반에는 커피를 담은 보온병과 초콜릿비스킷이 있었다. 릴리는 둘 다 사양했다.
“그래, 어머니는 어때요?” 마리가 물었다.
“그럭저럭요. 죽어가는 사람치고는. 고맙습니다.”
--- pp.9~10

“저 미답의 공간을 뭔가 새롭고도 매혹적이면서 독창적인 곳으로 바꾸어 이 마을 교양인, 준교양인 모두의 화젯거리가 되고자 한다면.”
“한다면?”
“중고서적 코너도, 마구잡이식 서고도 아닌, 우리 시대, 아니 어느 시대에든 가장 도전적인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정선한 책들의 전당이어야 하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다가 보다 충만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오. 왜 웃는 거지?”
불과 얼마 전, 서적상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후에야 그 직업에도 나름의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친구라면, 아무도 몰래 기술과 지식을 익힐 수 있다. 다만 그러는 사이에도 겉으로는 내내 자신의 자질을 사람들에게 과시해 보여야 한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줄리언은 노인의 아이디어 자체를 믿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사실을 아직 에드워드에게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 pp.36~37

에드워드는 내킬 때마다 나타났다. 때로는 며칠에 한 번, 때로는 몇 주에 한 번. 그리고 의자에 앉아 카탈로그와 거래장들을 검토했다. 그가 목표를 찍어주면 두 사람은 진을 마시며, 실리아가 전화를 걸고 거래를 이끌었다. 그러면 매달,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실리아에게 봉투가 들어왔다. 돈은 세어보지도 않았다. 그만큼 둘 사이에 신뢰가 깊었다. 에드워드가 멀리 출장을 가면(종종 그랬다오), 등기우편으로 봉투가 배달되었는데,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립다느니 하는 바보 같은 연서도 들어 있었다. 테디는 늘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여자깨나 울렸을 거유. 실리아가 말했다.
“무슨 일로 출장을 갔죠, 실리아?”
“국제 업무였지. 교육 같은 일 있잖우? 에드워드는 지식인이니까.” 실리아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다시 한숨. 조심스레 옷깃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행여 실수로 괜한 정보를 흘리지 않았나 걱정하는 듯했다. 아무튼 천국에서의 10년 얘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 p.65

“그래, 당신이 땅개들을 찾아 떠났으니 우리의 대장 탐지견은 누구이신가? 설마 캠프를 비워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에 스튜어트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첩보국의 현 전투 지시를 자세히 까발릴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앤은 계속 스튜어트를 노려보고 필립은 채프먼의 귀를 어루만졌다.
“조금 더 신중을 기한다면, 우리가 두 분께 듣고자 하는 사례사의 당사자가 항의한다 해도, 우리 이익을 위해 그에게 경고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말씀드리면,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와의 접촉은 모두 금지되죠. 이해하셨죠?” 스튜어트가 보다 공식적인 말투로 경고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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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르 카레 선생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유작은 전성기 걸작에 맞먹을 정도로 값지게 느껴진다. 한국어 독자여서 다행이다. 아직도 번역 안 된 작품들이 남았으니까. 유독 현실적이고 솔직하게 스파이 세계를 다루고 있는 『실버뷰』의 마지막 챕터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남자의 이미지가 계속 뇌리에 맴돈다. 르 카레 역시 죽은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아무도 모르게 탈출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위장 여권을 가지고 말이다. 거기 적힌 이름은 데이비드 콘웰도, 존 르 카레도 아닌 또 다른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위장이어도 그것은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영국 여권이리라.
- 박찬욱 (영화감독)
존 르 카레가 쓴 마지막 작품.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소설. 『실버뷰』는 스파이 소설의 거장이 남긴 작별인사다. 존 르 카레 특유의, 거미줄을 펼치듯 인물들을 풀어내고, 그들을 통해 독자가 진상에 접근해가도록 만드는 이 소설은 스파이가 한평생 충성을 다한 조직으로부터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의 순간을 직면하게 한다. 존 르 카레 스타일의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다. 이보다 훌륭한 이별은 없다.
- 이다혜 (『아무튼 스릴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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