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룡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진룡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위풍당당했으며, 180센티미터의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가 “작전을 나갔다가 근거지로 되돌아오는 데 하루에 백 리를 마치 날아다니듯 민첩하게 달렸다”라고 하며, 사람들이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서 그를 ‘준족(駿足)’ 또는 ‘번개다리[飛毛腿]’라고 불렀고, “발바닥에 한 줌의 털이 나서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고 땅을 주름잡아 훨훨 날아다니듯 했다”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이진룡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몇십 리나 되는 높은 절벽에서 압록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서 칭산거우의 근거지로 돌아올 정도로 수영도 잘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진룡이 압록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풍덩 하는 소리가 나면 어느새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오곤 했다”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 p.26
재판장이 “의병운동은 잘못된 불온 행동이다”라고 지적하자, 우재룡은 “지금 나라의 상태는 독립국이란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질은 없으며, 임금은 있으나 권한은 없으며, 군대가 해산당했으므로 일본인을 조선 내에서 전부 추방하여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으로 의병에 투신한 것이다. ……(독립이) 가능하다든가 불가능하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한 일이 없다. 조선인으로서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컨대 일을 도모함은 하늘에 있고,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라며 자신이 의병 활동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남선 의병대장 정용기의 의제(義弟)이다. 의형(義兄)과 맹서하기를 이 나라를 구하는 데 생사를 같이하자고 했는데, 의형이 순국했으니 사상만은 변경할 수 없다”라며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 p.41
‘15만 원 사건’은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대담하게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무기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거금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일제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동포에게는 그야말로 통쾌한 소식을 전해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광복 후에도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와 북간도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무력투쟁을 회고할 때 자주 인용될 정도로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제의 적극적인 통제로 구체적인 내용이 보도되지 못했고, 관련자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일제의 감시 등으로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지 못하다가 광복 후 생존자들의 노력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 p.53
이종일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손병희에게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손병희 역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을 통해 나름대로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식민 지배를 받던 세계의 약소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말부터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내세우며 대중운동을 준비했다. 여기에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자 크게 자극을 받아 3·1운동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종일은 보성사를 중심으로 천도구국단과 함께 3·1운동 준비 및 진행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 p.75
박노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박노영은 어쩌다 그 이름만 언급될 뿐 그의 생애나 저서는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아프리카 오지처럼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다. (……)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났던 그는 ‘동양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크 트웨인은 특유의 해학과 기지를 발휘한 풍자문학가로 잘 알려진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박노영 역시 문학적 자질은 물론 재치와 유머가 뛰어났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침탈을 일삼던 암울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 p.90
어윤희의 경우 1929년 4월 18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재판 기록에 누구도 선뜻 「독립선언서」 배포를 하려고 나서지 못할 때 민족의 독립을 고취하는 전단을 배포하여 개성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가 크다”라고 보도했다. 또한 형사들이 어윤희를 체포하며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천하에 여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느냐?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갈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당당했다. 어윤희는 조사 과정에서도 형사가 “배후가 누구냐”고 캐묻자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느냐?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한다”라고 훈계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 p.113
재판은 6~7차까지 이어지며 해를 넘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신문에서는 “안경신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매번 수백 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어 재판소 마당을 가득 메웠고, 재판정 안에서는 방청객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모두 안경신에게 쏠렸다”라고 보도할 정도로 안경신과 재판 결과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방청객이 부담스러웠던 재판부는 다섯 번이나 공판을 연기했고, 1921년 10월 26일 최종 판결이 열렸다. 그날 재판부는 “일심 판결을 취소하고 다만 치안방해와 공모죄를 인정하여 징역 10년에 처한다”라고 판결했다. 이에 안경신은 재판장 앞으로 나가 “내가 무슨 죄가 있어 3년간이나 가두어 두었다가 10년 징역에 처하느냐고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다시 증인이라도 불러 심문하여 달라”고 거세게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폭탄 투척 사건이 모두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 p.132
한훈은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역 책임을 맡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한훈은 구체적인 활동이 밝혀지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고, 대한광복회는 1917년 말 첫 번째 대상으로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에 대한 응징을 결행했다. 장승원은 의병이 봉기하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고 밀고까지 했던 경북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물이었다. 이후 지역 주민을 괴롭히는 친일 면장으로 악명이 높았던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훈의 활동도 일부가 밝혀졌다.
--- p.157
“나의 현주소는 대구형무소 제6감방이다”라고 답했고, 재판장이 선고하기 위해 장진홍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먼저 방청석을 향해 서서 “내가 잡힐 때까지 여러 사람에게 괴로움을 끼쳐서 대단히 미안하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자 즉시 방청석에서 울고 있는 친족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퇴장했다. 이후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권유로 재심을 청구했으나 같은 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장진홍에게 적용된 죄는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미수 등이었다.
--- p.181
일찍부터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평소에 “우리 단이 노리는 곳은 도쿄와 경성 두 곳으로, 우선 조선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도쿄 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우리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라며 지속적인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수흥은 이를 직접 실행에 옮기며 입증했다. 한편 이수흥을 밀고한 후 경찰서장에게 금일봉을 받았던 이준성은 광복 후인 1949년 3월 인사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때 이준성의 나이 마흔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석으로 풀려났고,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 p.209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영국의 스파이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박멸을 주장하는 등 전쟁을 방불케 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지식인과 사회 지도계층 그리고 유한마담 등 상류 계층에 영국을 배척하는 사상을 주입하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영어 사용은 유전 매독환자’라며 사회에서 최악의 암적 존재로 비판한 것은 영국을 배격하는 배영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심지어 일제는 “영어 사용은 영국이나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라며 자기 나라 말, 즉 일본어에서 영어를 분리하여 국가의 독립과 새로운 건설을 주장할 정도로 그들도 식민 지배가 최악의 상태이며, ‘자기 나라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은 곧 독립의 근간이었고, 다른 나라 말의 침투는 나라가 소멸하는 지름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 p.238~239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으로 행세하면서 일제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여 주목을 받았던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과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조선인 출신 일제 경찰 이정출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을 받고 의도적으로 의열단에 접근한 밀정으로, 두 사람 모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특히 황옥을 모델로 한 이정출은 현재까지 많은 연구 논문이 나왔지만, 그의 밀정 행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황만동’으로도 불렸던 황옥은 식민지의 청년 지식인이자 조선인으로는 오르기 쉽지 않았던 중간 간부까지 승진했던 일제의 관리였고, 1920년대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와 의열단 투쟁에서 민족운동가들과 함께 등장하는 대단히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