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내 말 잘 들어. 췌장암 4기라서 자기 여명은 육 개월 남았대. 그런데 내가 그까짓 암 덩어리 꼭꼭 씹어서 삼켜 없애버릴 거야. 자기 절대 안 보내, 아니 못 보내. 내가 반드시 살릴 거니까, 나 믿지?”
--- pp.27~28
간호사 선생님이 여러 차례 오셔서 “보호자께서는 이제 그만 물러가시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남편 곁을 떠나기 싫어서 이리저리 숨어다니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가장 느린 걸음으로 남편과 함께 병동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작별을 고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주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제 얼굴과 똑같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촉촉한’ 얼굴을 본 것 같네요. 문이 닫히는 순간, 힘없이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내 모습을 보신 다른 보호자 분께서 살짝 귀띔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병실에 올라갈 수 없지만, 남편께서 움직이실 수 있으면 병원 안에서는 만날 수 있어요.”
‘언제나 다시 남편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혔던 나에게 그 한마디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 pp.36~37
나는 당신만 괜찮다면 힘들더라도 주치의 선생님 말씀을 믿었으면 해. 당신과 나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세발자전거의 페달을 계속 밟듯이 치료받았으면 싶어. 물론 자연치료로 나은 분도 계시지. 또 당신도 항암치료를 받다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할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나를 못 본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힘들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항암치료를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의사 선생님들 믿고 항암치료를 받았으면 해. 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0퍼센트가 아닌 1퍼센트……. 우리가 그 1퍼센트 안에 들면 되는 거잖아.
--- p.48
이십여 분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오빠가 슬그머니 봉투를 손에 쥐여주더군요. 안 받겠다고 하니, 누구든 봉투 주면 받으라고……. 주는 사람은 봉투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어주는 거라고……. 5번 오빠 앞에서 씩씩한 척했지만, 그 안에 어떤 마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뜨겁게 전해져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다 보면 암이란 놈이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암이랑 싸워서 이겨내야 해. 다시 살아나서 평생 다 갚으며 살아가면 돼.”
--- p.58
운다고 병이 낫는다면, 기꺼이 하루 종일이라도 울겠습니다. 암이라는 놈이, 아니 이 세상 모든 병이라는 놈이 우리의 눈물, 절망, 한숨을 먹으며 자란다지요. 하지만 이 놈들도 웃음, 희망, 즐거운 마음 앞에서는 졸아붙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길은 있을 거라 믿고 이제부터는 절대 울지 않으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한순간에 가족과 지인들의 곁을 떠나는 것보다는 그래도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어서 지금부터라도 사랑하며 즐겁게 살 수 있으니 이걸로 위안을 삼으렵니다.
--- pp.63~64
항암치료의 또 다른 부작용 중 하나가 탈모라지요. 탈모로 빠진 남편의 머리카락을 줍고 있는데, 남편이 먼저 머리를 삭발하겠다 합니다. 두 달 전에 왕자님과 함께 갔었던 단골미용실로 갔습니다. 원장님께 남편 머리 삭발하러 왔다고 하니까, 평소에는 농담도 잘하시던 원장님께서 갑자기 마른 남편의 모습을 보고는 눈치를 채셨던 모양입니다. 별말씀 없이 의자에 앉으라 하시더군요. 중학교 입학 이후로 삭발은 해본 적이 없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던 왕자님이……. 삭발하는 도중에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저도 울고, 원장님도 따라 울고, 결국에는 셋이 같이 울었습니다. 저도 따라서 삭발을 하겠다고, 정말 그러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남편도 원장님도 극구 말리시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깟 머리카락은 언제고 다시 자랄 텐데…….
--- p.90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암 환자는 면역력이 약하니까 사람 많은 곳은 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그 말을 듣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편이 아팠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말만 듣고, 몸에 좋다는 맛없는 환자식만 해주고, 여행 한 번 같이 못 가고 그냥 보낸 것이 가장 후회가 되네.”
형부를 먼저 보낸 친한 언니께서 해주신 조언을 듣고 저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여기저기 다니기로 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잘한 결정인 듯합니다. 좋은 공기 코로 마시고, 멋진 풍경 눈으로 익히고, 맛있는, 아니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보는 게 진짜 행복이잖아요?
--- p.119
우리 부부도 이 5단계를 거친 것 같은데, 워낙 긍정적인 저희라서 그런지, 처음에 놀라서 한 이틀 울었던 것 빼고는 1, 2, 3, 4단계를 잠깐 맛만 보고, 곧바로 ‘수용’이라는 5단계로 바로 접어든 것 같아요. 암이란 놈이 왔다고……, 육 개월 남았다고……, 울기만 하고 있다면 뭐 그놈이 없어집니까? 티베트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지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울거나 슬퍼해서 암이 없어진다면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하루 종일이라도 울고 있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에게 닥친 일, 잘 달래 가며 즐겁게 살아가려고요.
--- p.133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2021년! 살아있음에 행복을 느끼며 올해 마지막 날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밥은 먹을수록 살이 찌고, 돈은 쓸수록 없어지고. 나이는 먹을수록 슬프지만, ‘당신’은 알수록 좋아지는 까닭은 당신과 함께한 올 한해가 즐거웠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 의미하고 사라진 글일지라도 제 마음에 남은 당신의 온유함과 따뜻함은 2022년에도 기억되고 이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제 친구여서 참! 좋았고, 가끔 당신에게 안부를 묻고 이렇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삶에 또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뿐인 2021년, 어설픈 대화에도 마음으로 응대해주신 친구들이 있기에 주위와 저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비록 남긴 내용은 사라질지라도 제 마음에 새긴 당신 마음은 영원할 것입니다.
--- pp.186~187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2021년이 지나가는 12월 31일이 지나가고 있을 때 우리 부부는 아무 말 없이 둘이 손 꼭 잡고 조용히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습니다. 12시가 넘어 2022년 새날이 시작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해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한 살 더 먹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 p.188
지난 일 년 동안 저희 부부의 생활과 생각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주위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우리 주위에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꽃 피는 것 하나에도 행복해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감동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터집니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경이입니다. 아프기 전에는 하고 싶은 일이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늘 ‘다음 주에……, 다음에……’ 하며 생각만 할 뿐 실행을 안 했는데, 지금은 일부러 시간을 쪼개 하고 싶은 일이나 보고 싶은 사람을 먼저 하거나 만나러 가고는 합니다.
--- p.204
사람들은 저희 부부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희 부부가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실 겁니다. 같은 노력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결과가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걸로 봐서는 기적이 찾아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있는데 기적이 그냥 찾아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저희의 노력, 눈물 대신 웃음, 원망 대신 사랑, 절망 대신 희망을 향해 하루하루 서로를 응원하고 나아간 그 노력의 결과라 믿습니다. 저희의 웃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여러분께 드립니다.
--- pp.266~267
제 인생의 끝이었을 것 같은 시간에 제 손을 잡아주고, 함께 힘들어하며 빛으로 꺼내준 남편처럼 이제는 제가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가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 편한 꽃길을 걷기보다는 힘든 길이라도 남편을 꼭 살려내어 끝까지 함께 살아보렵니다. 열심히 달리다가 둘이 함께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가다 보면 내리막길도 있고 쉼터도 있겠지만, 끝까지 함께 가보렵니다. 남편을 살리고, 저도 살겠습니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