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죽음 ―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욕구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죽음은 급기야 아름다운 것으로 격상된다. 19세기에 ‘타인’의 의미가 부상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사랑하는 타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뀐 것이다. 아리에스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 귀족 라 페로네 가족의 서신 모음과 개인 일기들을 통해 우리는 죽어가는 이의 아름다움, 죽음의 매혹 등을 보게 된다. 라 페로네 백작 부부의 자식 중 하나인 올가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죽음은 늘 시와 사랑과 뒤섞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임종 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침실은 예배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천사는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살아 있던 동안에도 그만큼 아름다웠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브론테 가족의 경우,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이러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폭풍의 언덕>에서 묘사된 에드거 린턴의 죽음 장면은 단순하지만 그 시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죽어가는 자의 침실은 번잡스런 방문객을 피해 좀더 호젓해지고, 죽음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는 재회의 시간이 된다. 죽어가는 아버지 린턴이 자신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딸에게 곧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며 그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놀라운 것일지라도 당시로서는 지극한 아버지의 사랑 표현일 따름이었다.
떠난 사람은 행복한 만남을 갖게 되지만 남는 사람은 이별을 견뎌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삶은 온통 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녀의 시에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찢겨”진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통과 그리움은 죽음에 대한 욕구를 낳게 된다. 죽음은 사랑하는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병적인 욕구는 “단순히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심층적인 상처이며, 그것도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시대적, 문화적 현상이었다.”
“그 옛날 전통 사회에서는 감성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보다 다수의 집단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면서 그 감성은 희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감성은 어느 누구와도 대치될 수 없으며 헤어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매우 특별한 극소수의 존재들에게 전적으로 집중된다.” “한 사람을 잃고 나면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죽은 이들 역시 아름다운 존재들이 된다. 이렇게 죽음은 아름다움이라는 가면 속으로 은폐되었다.
역전된 죽음 ― 죽음을 볼 수 없게 된 시대
“20세기에 서구 사회 내에서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 면에서 가장 앞선 일부 지역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죽음의 유형이 출현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역전된 것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며 죽음은 가리고 은폐해야 할 것이 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을 숨기고 가리기 위한 숨바꼭질을 보게 된다. 45세의 평범한 중년 남자인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나 친구들은 모두 그의 병을 가벼운 것처럼 취급하며 죽음을 외면하고, 심지어 의사조차 이에 합류한다. “모두가 이 온당한 거짓말을 그만두고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에게 끝까지 상태의 심각성을 은폐하기 위한 가족들의 거짓말과, 그런 가족들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기게끔 하기 위한 거짓말, 이 두 거짓말의 경연은 오늘날 우리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죽음이 단정치 못하고 추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플로베르가 죽어가는 보바리 부인의 구토와 혈농 등을 가차없이 그려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베르는 그녀의 비명, 경련, 이빨 부딪치는 소리, 벌어진 눈, 갈색 반점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혀 전체가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고, “제멋대로 굴러가는 두 눈은 마치 꺼져가는 두 개의 전구처럼 빛을 잃”는다. 이반 일리치의 치료 과정에서도 질병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라 페로네 가족의 아름다운 죽음과 확연히 다른 죽음이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이런 혐오감 때문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자의 추함으로 인해 죽음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그것이 주는 불쾌감을 참아낼 수 있는 소수의 가족들만이 임종을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임종 장소를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통증이나 질병과 더불어 일상적 삶의 일부였던 악취와 그러한 장면들을 이제는 우리의 감각이 견뎌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질병으로 인한 생리적 증상들이 일상성을 벗어나 위생, 의학, 도덕의 멸균 처리된 세계로 이송된다.” 이제 그 공개가 예의에 어긋난 것이 된 죽음은 사방이 막힌 병원의 병동에 격리되어 외부와 은폐된 채 이루어지며, 소독약의 냄새와 함께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을 볼 수 없게 된 역전된 죽음의 시대,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이다. 죽음을 일상에서 멀리, 더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단지 그것을 애써 잊는 것으로써 회피하고자 한다. 아리에스는 “오늘날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문제시하고 이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까지 말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 가운데 어느 것도 옳고 그른 것은 없지만 애써 회피하면 할수록 죽음의 무게는 우리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는 것, 오히려 죽음을 견디기 더 어렵게 된다는 것, 이는 아리에스가 굳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을 읽어가며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 일상적이고 공개적이며 친숙한 죽음
중세 초기에 죽음은 일상적이고 공개적인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죽음은 그 목숨을 거두어갈 이에게 미리 예고를 해주었고,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감지한 임종자는 이러한 사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원탁의 기사>나 <롤랑의 노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왕이나 기사들이 이런 죽음의 전형을 보여준다. <원탁의 기사>에서 “오 거룩하신 영주여, 그렇게 빨리 가시렵니까?”라는 물음에 가웨인(Gawain)은 “그래, 이틀을 못 넘길 것 같구나”라고 대답한다. 오늘날이라면 당연히 의사가 했을 말을 임종자 본인이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런 태도는 중세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중세에 “죽어가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 죽음을 준비했다.” 의사나 동료, 사제들보다도 “죽어가는 본인만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인해 묘지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 내부에 공존할 수 있었다. 단지 위치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묘지는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중세부터 17세기까지 묘지는 동시에 공공장소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온갖 놀이와 축제를 벌였으며, 종교적?사법적?정치적?상업적인 행사를 열었다. 1231년의 루앙 공의회에서는 “묘지나 성당에서 춤을 추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파리 시민들은 여전히 묘지에 모여들었다. “17~18세기에 생 인노상 묘지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아케이드였다. 할 일 없는 구경꾼들은 마치 팔레 루아얄의 아케이드에서 노닐듯이 서점, 잡화점, 옷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이곳을 어슬렁거렸다.” “너비가 3m 정도 되는 아치형의 둥근 천장 아래로 …… 대서소, 란제리 가게, 서점, 중고 옷가게들이 두 줄로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이 야단법석 속에서도 매장을 하고, 무덤을 파헤쳐 아직 육탈이 덜 된 시체들을 들어올렸다. 추운 겨울에도 묘지 터에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자신의 죽음 ― 삶과 부에 대한 끝없는 애착
중세가 끝나갈 즈음, 공동체의 결속은 약해지고 사회는 점차 개인주의화한다. 12~13세기, 특히 14~15세기부터 개인의 삶, 그리고 개인의 부활이 중요해진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나의 죽음’의 시기가 된다. 이 시기 개인들이 보여주는 태도 중 하나는 현세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열정적인 애착이다. “‘나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라는 문구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이 쾌락의 대상이며,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이러한 애착은 사물에 대한 애착으로 나아갔으며, 그리하여 사물에 새로운 가치, 즉 일종의 생명력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새로운 예술이 바로 ‘정물화’이다. 사물을 하나의 가치 있는 대상으로서 생각하게 된 이들은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이 정물화를 그렸던 것이다.
나의 죽음의 시기 개인들의 태도 중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사후에까지 지속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이들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가 죽은 이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며, 산 자들은 이러한 종교적 의례를 통해 죽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맞을 이들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여러 차례의 미사를 올려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러한 미사는 수 차례에서 수십 차례, 심지어 1,000번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엄청난 숫자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강력한 욕구는 사후에까지 자신의 물질 즉 부를 이어가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12~13세기에 수도원이나 학교에 기부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이런 기부는 유언을 통해 죽음의 순간을 맞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부는 가난한 자들이나 자선 학교 아동들이 자신의 장례 행렬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16~17세기의 유언장은 이 시대 사람들이 장례 행렬의 절차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당시의 유언자들은 자신의 장례 행렬에 동원될 사람의 수와, 촛불의 수, 장식의 종류 등까지 일일이 명시해두었다. “장례 행렬의 규모, 여기에 투자된 적선과 기부금의 액수가 고인의 부나 관대함의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선기금과 적선은 곧 천상에 대한 투자로서, 살아 생전에(기실은 죽은 후에) 행한 고인의 자선 행위가 사후 세계에서도 현세에서 못지않은 부와 명예를 누리도록 할 것으로 믿었다.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 시체의 유혹
16세기 이후부터는 가깝고 친숙했던 죽음이 점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멀어져갔는데, 그럼에도 죽음의 잔해이자 시각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시체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해부학이 유행하고 심지어는 시체 성애가 성행하기까지 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모순적 태도를 아리에스는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이라 부른다.
해부학은 자연 신학의 기초로서뿐 아니라, 의사나 판사들이 죽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방편으로, 신을 알기 위한 한 방법으로, 그리고 의료적인 이유로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의사나 과학자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해부학 강의실은 일반인들로 북적였으며, 약혼녀에게 해부 모형도를 선물하고 해부 실습 모임에 초대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7세기의 판화나 회화 작품에서 자주 묘사되는 이 해부학 수업은 논문 심사나 학생들의 연극 공연처럼 온 도시 사람이 가면이나 음료, 오락거리를 갖고서 몰려들어 함께 구경하던 일종의 사회적 대행사였다.” 당대에는 부자들이 자신의 집에 개인용 해부실을 마련해둘 정도로 해부학이 대유행이었다. 이러한 해부에 쓸 시체를 조달하기 위해 사체 절도 행위가 공공연하게 행해지기까지 했다. 실제로 18세기 당시 사체 절도와 매매 행위는 파리 행정 당국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시체 매매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묘지를 감시해야 할 정도였다.”
사드 후작은 <강즈 후작 부인(la Marquise de Gange)>(1813)이나 <쥘리에트(Juliette)>를 통해 개인의 시체 해부실을 묘사했는데, 그것은 “마치 토스카나 공국 대공의 환상적인 회랑처럼” 묘사된다. 또한 사드의 작품에는 죽은 자들과의 성관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사드 개인의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당시에 시체 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있었던 것에 사드가 어떤 효과를 더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17세기 이후의 그림에서 시체는 묘한 관능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18세기 문학에서 이미 죽은 자들과의 연애담이 수없이 등장했다. 이 가운데 몇몇은 ‘실화’라는 표제를 달고 있었다.” 사드의 작중 여주인공인 라 뒤랑과 쥘리에트는 성당 안에서 죽은 딸의 시신과 성관계를 맺는 아버지를 엿보게 되는데, 이들도 곧 그 행위에 합류하여 “시신과 관이 있는 지하 묘소 속에서 난교”가 벌어지게 된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건강’이 떠올랐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도 끝없이 장수의 비결을 찾고,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스포츠 센터나 공원 등은 운동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소위 ‘웰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도자처럼 되었다. 이렇게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애써 잊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문이나 뉴스 보도 등을 통해 늘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죽음의 장면은 넘쳐난다. 이렇듯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죽음을 일상으로 접하는 오늘날이지만 삶에서 죽음을 가장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죽음은 죽음에서 현실성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TV나 신문에서 전달되는 죽음도 마치 픽션처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실제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난과 실업 등으로 부쩍 자살 소식이 많은 요즘이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혹은 사고사이든 죽음은 언제나 끔찍한 어떤 것이다. 죽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며, 생의 종말이다. 예전에는 제 수명을 다한 사람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부르며 좋은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좀더 오래’를 외치는 오늘날 더 이상 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때라도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런 죽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는 죽음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죽음을 애써 잊는다.
죽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 혹은 죽어가는 사람도 우리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려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가문의 중대한 업으로 생각해온 우리이지만 그 조상의 묘지는 먼 시골 벽지에 (물론 명당을 찾아서라는 좋은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 명절만 되면 성묘객들의 발길이 길게 늘어서 지극한 마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죽은 이들은 우리의 생활이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의 경우 묘지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나가는 공공장소로서 늘 그들의 곁에 있었고, 고인의 묘는 성당 안에서 그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도록 방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늘날처럼 사방이 막힌 병원 침대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심지어 임종을 맞는 순간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현대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일종의 결벽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으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1,120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에서 저자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매 시대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르게 죽어갔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간과 함께 ‘아리에스 쇼크’를 불러일으킨 <아동의 탄생>(새물결, 2003), 조르주 뒤비와 함께 편집한 5권의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2)를 통해 익히 알려진 필립 아리에스는 공적 영역의 그늘에 가려졌던 사생활이나,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명된 아동 등 지금까지 역사에서 다루어오지 않았던 주제에 천착하여 인간의 삶과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역사 연구의 주제뿐 아니라 방법에서도 그는 개인 서신, 가정 일지, 판화나 그림 같은 도상 등 그 동안 역사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어온 사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록들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학의 자료를 확대시켰다.
<죽음 앞의 인간> 역시 기존에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을뿐더러 모두가 두려워하고 금기시해온 ‘죽음’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삼은 아리에스의 역작으로,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역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중세 초기에서부터 현대까지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고찰한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변천해왔다. 그것은 중세 초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죽음,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죽음’, 바로크 시대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던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전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역전된’ 오늘날의 죽음 등이다. 이렇게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라 ― 이 다섯 가지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서 변천 가능한 패러다임일 뿐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