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4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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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32쪽 | 638g | 153*224*30mm |
ISBN13 | 9788990816115 |
ISBN10 | 8990816114 |
발행일 | 2004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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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32쪽 | 638g | 153*224*30mm |
ISBN13 | 9788990816115 |
ISBN10 | 8990816114 |
한국어판 서문 / 옮긴이의 말 / 책머리에 / 감사의 글 / 모닝사이드판 서문 1. 들어가는 글 제1부 문화기술지 2. 문화의 구성요소 / 3. 계급과 제도화된 문화형태 / 4. 노동력, 문화, 계급, 그리고 제도 제2부 인식 5. 간파 / 6. 제약 / 7. 이데올로기의 역할 / 8. 문화적인 형태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이론에 관하여 / 9. 새로운 시작과 그 이후 부록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싸나이’들의 생각 / 모닝사이드판 후기 / 참고자료 |
<<학교와 계급 재생산>>은 영국의 남자 청소년들의 '반항'이 어떻게 지배와 계급재생산으로 이어지는지를 탐구하는 저작이다. 저항 혹은 반항이 어떻게 지배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영국 노동자 계급 남자 소년들이 여성과 이주민에 대한 차별의식을 내재화하면서 스스로의 '남성다움'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학교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면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억압적 장치로서 학교가 지식노동/육체노동으로 노동을 위계적으로 분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육체노동자 남성 청소년들은 이러한 억압적 성격을 분명히 알고, 학교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들의 반항은 아이러니 하게도 중산층은 다시금 중산층이 되고, 블루칼라는 블루칼라가 되는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이는 남자 청소년들이 "나는 백인 남자니까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즉 여성과 비백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스스로의 불리함을 메우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대의'를 외치는 운동의 방식이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질 수 없음을 함의 한다. <<학교와 계급 재생산>>은 진정한 해방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생각보다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아마 교양서적인듯 교양서적 아닌, 사실은 전문 사회과학 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한다. 과연 그럴까. 일정 부분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마침 오늘 인터넷을 보니, 이 책과 연관이 직접적으로 있는 내용은 아니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는 분석 기사가 있었다. 학교는, 적어도 말 그대로 공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라면 그 길을 탄탄히, 그리고 다양하게 하는데 힘을 써야 하는데 과연 우리나라 학교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학교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노동자 계급 스스로 이 책의 표현처럼 스스로 삐딱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나아지지 않겠지.
휴...참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그리고 사회의 여러 일들에 대해 올바르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며 바르게 사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낟.
빌리 엘리어트을 보면(영화도 봤고, 최근에 뮤지컬을 볼 기회도 있었다) 영국 광부노조의 파업이 주된 배경으로 그려진다. 광부로 살아가는 것이 사회의 바닦에 가까운 삶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 사이에서 발레리노라는 존재가 탄생하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거부감을 강하게 표하고, 그겋을 브르조아에 대한 적개심으로까지 확대시키기도 한다. 당연히 석탄산업 합리화를 통해 자기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반대할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더 낳은 -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 삶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 직업을 선택했고, 동시에 선택을 강요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5년도 더 오래전에 이 책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사회과학에 대해 약간 눈의 떠질 무렵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하여간 괜찮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단편적이었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모호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브르디외나 라깡은 차라리 뭔 소린지 알겠고, 그람시나 패리 앤더슨 등도 대충의 요약을 보면 논점을 알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쉬울 것 같은(???) 인류학적 글쓰기에 대해 그 요지가 맥락을 잡을 수 없었던 인상으로 남았다.
15년만에 드디어 이 저작을 손에 잡고 읽어가는 동안 내가 당시에 왜 그랬었는지, 왜 이처럼 단순한 생각의 차이... 아직 그 전통이 성숙하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 계급의 문화와 영국(서구)의 차이를 짐작도 하지 못했었던 것이란 이해를 하게 되더라. 그리고 또한 미국이든 영국이든 다른 서구 나라든 영화나 소설등에서 보이는 무지한 남성 어른의 마초적 문화에 대해서도 그 정서가 머리로 약간 파악이 되고. ... 아마도 아주 중요한 개념어였던 '간파'와 '제약'에 대해서 15년 전에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었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지 않을까 싶다.
그래 단순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성숙된 노동자계급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논리를 가능한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청소년기부터 형성한다. 삐딱선을 타기... 작정을 하고 문제아의 길을 가다보면, 지배이데올로기들, 특히 선생들의 말에 대해 그 허점을 파악하기가 쉽게 된다. 100개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해 모두 빼딱하게 나가다보면, 그중 한두개는 결정적인 저항이데올로기의 문법과 부합하게 마련이다. ...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이해하나?
절대 나쁘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삶의 조건으로서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기술한 것 뿐이다. 그리고 저항이데올로기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처저하게 연역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 러 나....
삐딱선을 타기 - 간파 - 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아스팔트 도로 혹은 철로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원초적인 약점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제약이다. 이 모든 것 또한 개개인이 선택하는 것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역시 저자의 말처럼 '자본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는 역량만으로는 다른 대안적 사회형태를 예시하는 능력에 이르지 못한다' 그 문제아들의 창조성은 집단에서 생산되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주관적 확신이 너무 넘쳐나면서 생기는 깊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영화에선 해피엔딩이었지만, 발레를 하고자 하는 소년의 꿈을 꺽으려는 아버지와 형의 태도, 이것들은 바로 이 함정의 소용돌이에서 파생된 것들이리라. 그리고 그 소용돌이 깊숙한 곳은 결국 한시적으로 되돌아라고, 결국 포기하는, 그리고 포기되어버리는 광산인 것이고.
70년대 중반 영국의 이야기다. 빌리 엘리어트는 80년대 초반이겠고. 물론 발레, 고급문화의 형태가 그런 수렁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건 아니다. 다만, 백년 이상의 투쟁의 역사를 통해 도달한 모델이 영국의 노급이라면... 다양한 성과도 있기에, 그리고 우리네 학교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에도 당연 도움이 되기에 유용하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안타까움은 계속 남는다.